[include(틀:송서)] [목차] == 개요 == 袁顗 (420 ~ 466) [[송(남조)|유송]]의 관료로 자는 경장(景章). 진군(陳郡) 양하현(陽夏縣)을 본관으로 하는 진군 원씨(陳郡袁氏) 출신이다. == 생애 == 원의는 태위 원숙의 조카이며, 아버지는 원숙의 형 원순(袁洵)이다. 원순은 오군 태수를 역임했다. 원의는 처음 예주(豫州) 주부(主簿)로 제수되고 수재(秀才)로 천거되었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시흥왕(始興王) [[유준(유송)|유준]]의 행참군(行參軍), 저작좌랑(著作佐郞), 여릉왕(廬陵王) [[유소(여릉왕)|유소]]의 주부, 무릉왕(武陵王) 유준의 주부, 여강(廬江) 태수, 상서도관랑(尙書都官郞), 강하왕(江夏王) 유의공의 기실참군(記室參軍), 여음왕(汝陰王)의 문학(文學), 태자세마(太子洗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453년, 원순이 오군으로 부임하면서 원의도 아버지를 따라 오군으로 갔는데, 이때 [[문제(유송)|문제]] 유의륭의 태자 [[유소(유송)|유소]]가 유의륭을 시해하자 안동장군(安東將軍) 수왕(隨王) [[유탄(유송)|유탄]]이 거병하여 유소를 토벌하고자 출병하면서 원의를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삼았다. 한편 무릉왕 유준이 신정(新亭)에서 제위에 오르고 유소를 토벌하니 이가 제4대 황제인 [[효무제(유송)|효무제]]였다. 원의는 정원랑(正員郞)에 제수되고 진릉(晉陵) 태수를 역임했으며, 부친상을 치른 뒤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기용되고 다시 진릉 태수로 제수되었으며, 아버지의 작위인 남창현오등자(南昌縣五等子)를 습봉하였다. 458년, 동해왕(東海王) 유위의 사마(司馬)로 제수되고 심양(尋陽) 태수를 겸임해으며, 강주(江州)의 사무를 맡았다. 같은 해, 의양왕(義陽王) [[유창(북위)|유창]]이 강주로 부임하면서 원의는 다시 유창의 사마가 되었고 종전과 같이 태수직을 받았다. 유창의 군부가 해체된 뒤 원의는 사마에서 해임되고 영삭장군(寧朔將軍)이 더해졌으며, 태수직은 내사로 고쳐졌다. 460년, 효무제가 유자방을 심양왕(尋陽王)으로 봉한 뒤 원의는 유자방의 사마가 되었고 회남군(淮南郡)과 선성군(宣城郡)의 사무를 맡았다. 461년,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임명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냈으며, 예주 대중정(大中正)을 겸임하였다. 463년, 시중(侍中)으로 전임되었다. 464년, 진안왕(晉安王) [[유자훈]]의 장사, 양양(襄陽) 태수로 제수되고 보국장군(輔國將軍)이 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영가왕(永嘉王) 유자인의 장사, 광릉(廣陵) 태수로 제수되었다. 하지만 이 벼슬을 받기도 전에 효무제가 붕어하고 효무제의 태자 [[전폐제(유송)|유자업]]이 즉위하면서 원의는 다시 시중이 되고 전군장군(前軍將軍)을 겸임하였다. 당시 효무제는 숙의(淑儀) 은씨(殷氏)를 총애했고 숙의 은씨의 소생인 신안왕(新安王) 유자란도 효무제로부터 두터운 총애를 받고 있었다. 반면 태자 유자업은 동궁에서 많은 잘못을 저질러서 효무제는 유자업을 폐위하고 유자란을 세우려는 뜻을 드러냈다. 하지만 원의는 유자업이 학문을 좋아하고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며 유자업을 변호했다. 효무제는 또 심경지의 재능을 좋아하지 않아서 심경지를 헐뜯었는데, 원의는 심경지가 충성스럽고 근실한 데다 재능이 있으므로 중임을 맡을만하다고 변호했다. 이로 인해 유자업은 원의에게 매우 감사했고 심경지도 속으로 원의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465년, 제위에 오른 유자업은 대신들을 주벌한 뒤 원의를 기용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기고자 원의를 이부상서로 삼았으며, 신감현자(新淦縣子)로 봉하고 식읍 500호를 내렸다. 하지만 유자업의 마음이 바뀌면서 원의에 대한 총애와 대우는 점점 약해졌다. 유자업은 처음 원의와 심경지, 서원에게 관리의 선발을 맡겼으나 나중에는 도리어 이를 원의 등의 죄상으로 트집잡아서 관리들에게 이들에 대한 탄핵을 명해서 원의는 평민의 신분으로 직무를 겸하게 되었다. 유자업이 호숙(湖熟)을 며칠 동안 오가도 원의는 유자업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원의는 자신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까 염려해서 유자업에게 자신의 전출을 요구했고 심경지가 원의를 위해 유자업에게 완강하게 요청하면서 유자업의 허락을 받아냈다. 원의는 건안왕(建安王) 유휴인의 장사, 양양 태수로 전출되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더해졌으며, 이후 사지절(使持節), 독옹양남북진4주영주경릉수2군제군사(督雍梁南北秦四州郢州竟陵隨二郡諸軍事) 겸 영만교위(寧蠻校尉), 옹주 자사가 되었다. 부임하기 전, 원의의 외숙부인 채흥종이 원의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양의 세성은 불길한 징조인데, 어떻게 그것을 무릅쓰려는 것인가? 그러자 원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눈 앞에서 시퍼런 칼날이 번쩍이는데도 날아오는 화살을 막지 못하는 것은 사태에 완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출은 본래 범의 아가리에서 살아서 빠져나오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도리는 아득히 먼데 어떻게 모두 들어맞겠습니까? 만약 그런 징조가 있다면 마땅히 덕을 갈고닦아서 그것들을 모두 물리칠 것입니다. 원의는 말을 마친 뒤 허둥지둥 발걸음을 재촉했고 추격대가 오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후 심양에 이르자 원의는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화를 면했구나. 원의는 등완과 매우 친해서 등완을 찾을 때마다 항상 밤을 지새웠다. 당시 사람들은 원의와 등완의 본적이 달랐기 때문에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것은 다른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원의는 양양에 도착한 뒤 유호(劉胡)와 함께 병기를 수선하고 사졸들을 모았다. 한편 건강에서는 유자업이 시해당하고 상동왕(湘東王) 유욱이 조정을 장악하여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6대 황제인 [[명제(유송)|명제]]였다. 원의는 명제가 즉위한 뒤 우장군(右將軍)으로 진호되었다. 당시 형주(荊州) 전첨(典籤) 소재(邵宰)가 강릉으로 돌아가던 도중 양양을 경유했는데, 원의는 상황이 이미 타개되었지만 식량과 무기가 이미 충분하지 못해서 명제를 추대하려고 했다. 이때 원의의 아들인 비서승(秘書丞) 원전(袁戩)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단 표문을 올리면 곧바로 그의 신하가 되는데, 신하의 신분으로 임금을 토벌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의는 원전의 말에 따라 태황태후의 명령을 받들어 거병했다고 칭하며 군부를 세우고 각지에 격문을 날렸으며, 진안왕 유자훈을 황제로 받들고 등완에게 서신을 보내 갑옷을 풀지 말라고 권했다. 유자훈이 제위에 오른 뒤 원의는 안북장군(安北將軍)이 되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가 더해졌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420년 출생]][[분류:466년 사망]][[분류:진군 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