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29년 정당]][[분류:1945년 해체]][[분류:크로아티아의 정당]][[분류:분리주의 정당]][[분류:파시즘 정당]][[분류:기독교 우파 정당]][[분류:테러조직]][[분류:사이비 종교]][[분류:제2차 세계 대전/부대]][[분류:제2차 세계 대전/전쟁범죄]] [include(틀:파시즘)] [include(틀:나치즘)] ||<-2> [[파일:우스타샤 상징.svg|width=200&height=200px]] || ||<-2><:>{{{#FFFFFF '''Ustaša - Hrvatski Revolucionarni Pokret'''}}}|| ||<-2> '''Za Dom, spremni![br]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 || '''한글 명칭''' ||우스타샤 - 크로아티아 혁명 운동 || ||<:>'''약칭'''||Ustaša || ||<:>'''창당일'''||[[1929년]] [[1월 7일]]|| ||<:>'''해산일'''||[[1945년]] [[5월 8일]]|| ||<:>'''지도자'''||[[안테 파벨리치]] || ||<:>'''정치적 스펙트럼'''||[[극우]]|| ||<:>'''이념'''||[[파시즘]]([[교권 파시즘]]) || ||<:>'''종교'''||[[가톨릭]] || || '''당기'''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width=150]] ||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external/media.moddb.com/23lxxfa.jpg]]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반[[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이다. [[파시즘]]과 [[가톨릭]]이 섞인 결과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29년]] 파시스트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1889~1959)에 의해 창설되었다. 우스타샤라는 이름은 '서다', '오르다'라는 뜻의 단어인 'ustati'에서 유래했으며 반란을 뜻한다. 당연히 이들도 [[나치식 경례]]를 채용했는데 경례구호는 '''"Za Dom, spremni!(조국을 위해 준비하라!)"'''였으며 이 구호는 [[나치 독일]]의 'Sieg Heil'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붕괴되면서 튀어나온 세력에 가까운데 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위시한 세르비아와 협력해 자리를 공고히 하기를 원했지만 세르비아인들의 중심으로서의 자리가 크로아티아인들의 정치적 위치에 부정적으로 작용할까봐 두려워했고 이에 유고슬라비아 내부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란을 주모했다.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적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실제로도 크로아티아의 [[네오 나치]]들은 서로 우스타샤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이들이 유고슬라비아에서부터의 민족적 독립을 위해 일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하위 무장 조직으로는 [[우스타샤 민병대]]가 있다. 우스타샤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이번에는 세르비아인뿐만 아니라 [[보스니아인]] [[무슬림]]까지 척살대상으로 삼았다. [[1995년]] [[데이턴 협정]]에 따라 투지만은 우스타샤를 해산했다. 이들의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인한 세르비아인 학살은 반 크로아티아 감정을 세르비아인들에게 남기기에는 충분했고 전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 이후에 티토가 억누르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대대적인 세르비아에 의한 크로아티아인 학살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활동과 만행 == [include(틀:제노사이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41년]]에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 약칭 NDH)이 [[괴뢰국]] 형태로 추축국이 점령한 [[유고슬라비아]] 일부에 세워졌다. 이 나라는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자 군주국이었으며 [[사보이아 왕조]] 방계인 아오스타 가문의 아이모네[* 1900~1948, 2대 공작의 차남이자 4대 공작. 1942년 형이 아들 없이 죽자 공작위를 이어받았다. 부인은 [[그리스]] [[콘스탄티노스 1세]]의 딸 이리니 공주(1904~1974).]가 [[토미슬라브 2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정부의 실권은 우스타샤와 그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쥐고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는 물론 [[나치 독일]]과 [[헝가리 왕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점점 세력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이 동안 우스타샤는 '1/3론'이라는 정책을 세웠는데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1/3은 죽이고, 1/3은 개종시키고, 1/3은 쫓아낸다는 소리다. 그 결과 세르비아인 25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40만여 명의 세르비아인과 10만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하였고, 20만 명이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당했다. 말 그대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협력한 것이다. 물론 대다수 살아남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 주민들은 학살과 탄압을 피해 크로아티아의 고향을 버리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물론 일부는 살던 터전을 버리지 못해 우스타샤의 학살을 피하려고 크로아티아인, 카톨릭교도인척 하며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고. 이들은 세르비아인 학살에서 총으로 쏴 죽이고 산 채로 태워 죽이기부터, 심지어 우스타샤 신병에게 팔다리를 묶은 세르비아인 또는 유태인들을 배를 갈라 죽이게 하는 시험을 보게 했다고 하며 사진까지 남아 있다. 심지어 임신부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게 하여 학살하기도 했다. 이를 주도한 비밀경찰청장이라든가 하는 공직들은 가톨릭 사제들로 채워졌고 강제수용소 소장도 가톨릭 사제 출신이었다. 당시 발칸 지역에 주둔하던 독일군들([[슈츠슈타펠|SS]]가 아닌 일반 [[독일 국방군]] 병사)조차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자그레브에 위치한 점령군 사령부도 그들의 잔혹함에 질려서 "얘네랑 손 끊으시죠?"라고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에게 전보를 치며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인자츠그루펜]]이나 [[슈츠슈타펠|SS]]를 상대로 살인기술 수업까지 열었고 이에 감탄하여 배워가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민 알후세이니]]의 협조로 이곳에서 무장 SS 사단인 [[제13무장산악사단|한트샤르]]가 징집되기도 하였다. 1943년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가 실각됨으로서 이탈리아가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1944년 헝가리가 자국 보호를 위해 도망가고 독일군까지 물러나자 우스타샤는 [[파르티잔]]에게 쫓겨나 궤멸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인민재판으로 궐석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나, 정작 파벨리치는 스페인 및 아르헨티나, 칠레 등 여러 나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망명 도중 1957년 [[아르헨티나]]에서 결국 유고 티토 정부에서 보낸 암살자의 총탄에 맞았다.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1959년 [[스페인]]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병원에 누워 있다가 죽었다. 우스타샤의 제4 군단장을 맡은 라파엘 "란코" 보반(Rafael „Ranko” Boban, 1907–1945?)은 전후 행적이 묘연한데 1947년 크로아티아에서 살해되었다는 설과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 육군에 입대해 [[6.25 전쟁]]에 종군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일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세르비아]]계의 [[체트니치]](Четници)도 있다. 체트니치는 체트니크(Четник)의 복수형인데 단수형인 체트니크라고도 알려져 있다. 체트니치는 원래 [[나치 독일]]과 그들에 빌붙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저항하는 조직으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와 비슷한 성격이었다. 문제는 얼마 안 가 변질되어 독일군보다는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과 대립했으며,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는데 힘을 쏟았다. 결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망명 정부도 이들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리고, 끝에 지도자인 드라골류브 "드라자" 미하일로비치(Драгољуб „Дража” Михаиловић, 1893–1946)는 아들마저도 배신자로 규정하고 외면한 끝에 재판을 받고 종전 뒤 처형당했다. 그리하여 체트니치는 시작은 우스타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세르비아인의 모임이었으나 스스로도 우스타샤의 학살을 답습하면서 파르티잔의 공세를 받아 붕괴되었다. == 평가 == 우스타샤의 학살은 세르비아계에 뿌리 깊은 피해의식을 남기게 되었다. 이는 결국 크로아티아계 주민에 대한 [[체트니크]]의 보복 학살,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을 보복 학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Remove Kebab]]이 흔히 알려진 반튀르키예/이슬람 정서의 노래가 아니라 우스타샤놈들이 다시 쳐들어오니 먼저 나가 싸우자는 내용으로 '튀르키예(турци)'라는 단어는 3절에만 딱 2번 등장한다. 티토 사망 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나 [[라도반 카라지치]], 밀란 바비치 등 세르비아계 유고 연방 정치가들이 "국민 여러분, 우리 세르비아인들이 뭉치지 않으면 저 크로아티아 가톨릭 파시스트, 보스니아 무슬림 놈들이 우리를 제2차 세계대전 때처럼 학살하고 공격할 겁니다."라면서 선동하여 대세르비아주의를 유행하게 했고 급기야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직후에 [[예방전쟁|우리가 학살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는 논리]]로 다른 민족을 공격해 학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보스니아 내전]] 중에 체트니크도 재결성되었고 유고 연방군,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일당과 함께 학살을 주도했다. 실로 크로아티아 근현대사에서 가장 추악한 과거사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느 [[추축국]]들이 그랬듯 크로아티아에서 우스타샤의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를 대놓고 애국자로 추앙하는 이들도 있다. [[하영식]]의 <굿바이 바그다드>를 보면 나오는 우스타샤 기념비라든지... 물론 세르비아에서는 학살자를 기린다고 분노했다. 이는 크로아티아의 일만은 아니다. 2차대전 당시 [[폴란드]] 남동부의 볼히니아(Volhynia)와 동부 갈리치아(Galicia)에서 무려 '''10만여 명 가까이 되는''' 폴란드인들을 대량학살하고 나머지는 내쫓아서 인종청소를 감행한 [[스테판 반데라]]와 휘하 조직 우크라이나 봉기군(Ukrainian Insurgent Army)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조직(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은 [[우크라이나]] 일부에서는 조국 독립에 몸바친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물론 폴란드에서는 대량학살자를 찬양한다고 반발한다. 우크라이나의 진보적인 사람이나 친러적인 사람들도 반발한다. [youtube(F2G79MClyYI)] >Far-right Croats mark massacre of pro-Nazis in WWII (c. 2019 / [[AP통신]]) 남오스트리아에 묻힌 어느 우스타샤 군인들의 추모식인데 크로아티아측에서 신우스타샤를 비롯한 국수주의자와 신우스타샤 성향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대거 원정해 미사를 집전하고 추모했다. 한편 저편에서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로 보이는 이들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구 유고 연방]] 깃발을 들며 정체불명의 랩송[*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고양하는 노래로 추정된다.]을 틀고 있는 채로 무언의 맞불시위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댓글이 아주 가관인데 우스타샤를 나치가 아닌 공산주의와 맞서싸운 애국자로 옹호하는 댓글과 이에 반발하는 세르비아인의 키배가 일어났다. 과거 청산에 대해서는 독일과 일본이 크게 알려져 있지만 이 동네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까지도 서로 내가 옳았네 니가 틀렸네 하는 수준. 아직까지도 크로아티아는 동부 유럽 지역에서 [[루마니아]][*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이기도 했고 공산화 이전 나치에게 협력했던 [[이온 안토네스쿠]] 전 총리 등 전직 정치인사들을 복권시키기까지 했다.], [[헝가리]], [[발트 3국]][* 다만, 발트 3국의 경우 사정이 크로아티아나 루마니아, 헝가리와는 약간 다르다. [[발트 3국 점령]],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문서 참조.] 등과 더불어 나치 등 추축국 세력들에게 부역한 역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 나라다. [[UEFA 네이션스 리그/2018-19 시즌]]에도 크로아티아 홈경기는 무조건 무관중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유로 2016 때 크로아티아 관중들이 대놓고 '''[[나치식 경례]]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가톨릭계에서 우스타샤를 마치 광복군처럼 찬양하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는데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한국 가톨릭 교계 신문인 평화신문이 우스타샤를 가톨릭 광복군이라는 투로 보도했다가 진실이 드러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선술한 <굿바이 바그다드>를 쓴 하영식은 이걸 언급하면서 '한국 가톨릭계의 학살자 찬양, 기관총을 든 신부님'이라는 비난에 일부 가톨릭계가 반발하기도 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2세]]가 이들을 비호한 혐의 때문에 [[나치]]에 호의적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큰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스타샤의 학살과 관련하여 비판을 받는 [[https://en.m.wikipedia.org/wiki/Aloysius_Stepinac|알로지제 스테피나츠]] 당시 자그레브 대주교가 전범재판에서 16년형이라는 형을 선고받았음에 반발하면서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분노한 티토는 스테피나츠를 석방하고 단교해 버렸다. 스테피나츠는 우스타샤에 대해 협력했던 건 아니고 사적으로는 비판했으나 공적으로 미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https://en.m.wikipedia.org/wiki/Jozo_Tomasevich|Jozo Tomasevich]]는 저서 [[https://books.google.co.kr/books?id=fqUSGevFe5MC&redir_esc=y|''War and Revolution in Yugoslavia, 1941–1945: Occupation and Collabo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1) 개인들과 집단들을 돕는 사적인 행위에서는 "그의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최고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다(deserves highest praise, although his actions were not always successful, 563쪽)" (2) 그러나 "세르비아 대상 제노사이드와 우스타샤 정권에 대한 스테피나츠의 언행에는 심각한 결핍이 있다.(there are serious shortcomings in Stepinac’s statements and actions toward the Ustashe regime and its genocidal actions against the Serbs and the Serbian Orthodox Church, 564쪽)", "스테피나츠 대주교도 그 나라의 어떤 가톨릭 주교도 ... 공적 저항의 말을 하지 않았다.(neither Archbishop Stepinac, nor any other Catholic bishop in the state...uttered one word of public protest, 537쪽)" 스테피나츠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8년 시복되었다. 물론 가톨릭 교계에서 나치에 동조한 성직자들만 있었던 건 아니고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같이 나치에 항거한 성직자도 있었다. [[진중권]]이 과거 자신의 저서에서 [[박홍(종교인)|하느님의 안기부장이자 안보의 데이빗 카퍼필드]]를 비판할 때 가톨릭도 잘한 게 없다는 논거로 비오 12세의 [[나치]] 비호(설)와 우스타샤에 대해 잠깐 언급하기도 했다. == 당가 == '''총은 발사되고'''(원제는 'Puška Puca'.) [youtube(MdxtMqBFGt8)] == 미디어에서의 등장 == [[레인보우 식스 시리즈]] 중 [[레인보우 식스 3 : 레이븐 쉴드]]의 메인 악역인 백만장자 니콜라 고스피치(Nikola Gospic)가 우스타샤 출신이라는 설정이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자신의 꼭두각시를 앉혀 남미의 유전지대를 장악하고, 대규모 테러를 일으켜서 자기 유전지대의 가치를 급속히 상승시켜 세계에 파시스트 혁명 바람을 일으키겠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음모를 실현하기 전 레인보우 팀에게 처단당한다. [[Hearts of Iron IV]]에서 유고슬라비아가 연합국에 가입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반란을 일으키며 추축국에 가입한다. 이때 지도자는 [[안테 파벨리치]]. 반대로 유고가 추축국에 가입하면 [[페타르 2세]]가 반란을 일으켜 유고 연방이 연합국에 가입한다. 나라가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면 소련을 인정하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때는 사방이 추축국에 포위된 상태에서 이탈리아의 침공[*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와 친선을 맺는 포커스가 있기는 하나 거의 반드시 유고 침공을 선택한다.]을 막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