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서울에 있던 효종의 잠저,rd1=어의궁)] ---- [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5> [[파일:인천광역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ffffff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 || 19호 ||<|2> ← || '''20호''' ||<|2> → || 21호 || || 구 인천 일본58은행 인천지점 || '''용흥궁''' || 충렬사 || ---- ||<-2> [[파일:인천광역시 휘장_White.svg|width=28]] '''{{{#ffffff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 ||<-2> {{{#fff {{{+1 '''용흥궁'''}}}[br]{{{-1 龍興宮}}}}}}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용흥궁,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동문안길21번길 16-1[br](강화읍, 용흥궁)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지 || || '''{{{#fff 수량 / 면적}}}''' || 3동 / 2,496㎡ || || '''{{{#fff 지정연도}}}''' || [[1995년]] [[3월 2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37039.jpg|width=100%]]}}} || || {{{#gold ''' 용흥궁 전경'''}}}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별궁]]. 25대 임금 [[철종(조선)|철종]]의 잠저 중 한 곳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다. === 역사 === === 강화도령의 배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철종 (복원).jpg|width=100%]]}}} || || {{{#gold '''용흥궁에 살았던 철종 이변(초명 이원범)'''}}} || [[별명]]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훗날 [[철종(조선)|철종]]이 될 이원범은 [[전계대원군|전계대원군 이광]]의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익선동]] 일대.]에서 태어나 한동안 그곳에서 자랐다.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 [[회평군|회평군 이명(혹은 이원경)]], [[영평군(1828)|영평군 이경응(초명은 이욱)]].]들과 함께 [[조선/왕사|조선 왕실]]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으로 그럭저럭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사망]]한 것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헌종(조선)|헌종]] 10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형 [[회평군|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되면서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이명은 [[사형]]당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영평군(1828)|이욱]]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갔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후 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원범은, 강화도에서 [[왕족]]이 아닌 평범한 [[백성]]으로 생을 마칠 '''뻔'''했으나... == 지존이 된 시골 청년, 그 이후 == '''일약 인생 역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1849년([[헌종(조선)|헌종]] 15년) 헌종이 [[후손|후사]]없이 23살이라는 [[요절|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당시 [[영조]]의 [[후손]]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전계대원군|이광]]의 아들들밖에 없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왕후|순원왕후 김씨]]는 이광의 아들인 이원범을 다음 [[국왕]]으로 지명했다.[* 이원범 위로는 작은형 [[영평군(1828)|이욱]]이 있었지만, 대체로 양자로 입적해 '나가는 집안'의 '남은 장자'는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므로 둘째가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원범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역시 [[장남]]이 아니었던 [[선조(조선)|선조]]와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있다.] 이 시기에 직계 왕통(혈통)이 자주 단절된 이유는 [[효종(조선)|효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종(조선)|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조선)|숙종]]은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숙종은 아들이 몇 명 있었지만 [[영조]] 빼고는 대가 끊기고, 영조도 아들을 둘 뒀지만 장남 [[효장세자]]는 어린 시절 사망하고 후손을 남긴 아들은 [[사도세자]] 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아들을 다섯을 두었지만 아들 둘의 대는 끊겼고[* [[의소세손]]과 [[정조(조선)|정조]]의 대([[헌종(조선)|헌종]]이 [[후손|후사]] 없이 죽으면서 완전히 끊김).] 넷째 [[은신군]]과 다섯째 [[은전군]]은 10몇 촌이 넘어가는 친척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 은전군의 [[양자(가족)|양자]] [[풍계군]]은 은전군과 3촌이라는 아주 가까운 촌수였지만, 풍계군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풍계군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인 [[완평군|왕족]]이 10몇 촌이 넘어가는 먼 [[친척]]이었다. 그것도 [[철종(조선)|철종]] 즉위 후 이루어진 [[입양]]이었다.] 은언군은 아들을 7명을 두었지만 후손을 남긴 아들은 [[전계대원군]] 밖에 없었다. 즉 헌종 사후 '''실제 효종의 피를 받은 왕족은 이원범 뿐이었던 것이다.'''[* [[은언군]]의 장손 [[익평군|익평군 이희]]와 이원범의 형 [[영평군(1828)|이욱]]이 있긴 했지만 각각 은언군 종가와 전계대원군의 대를 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을 빼면 정말 '''이원범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록 선왕 헌종보다 한 [[항렬]] 높았지만 궁여지책으로 그가 왕이 되었다. 뭐 무식하기까지 했으니 [[안동 김씨|세도가]] 입장에선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었겠지만.[* 다만 [[철종(조선)|철종]] 본인의 항목에선 철종이 일자무식이 아니라는 관점이 우세한 편이다. 그래도 아주 일자무식은 아닐지언정 [[왕]]으로서의 기본 [[소양]]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철종(조선)]] 문서 참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blog.knsu.ac.kr/201309222209110.jpg|width=100%]]}}} || || {{{#gold '''〈강화도행렬도(江華島行列圖)〉. 북한의 평양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이원범]]은 자신의 [[은언군|할아버지]]나 [[회평군|큰형]]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이원범의 형 [[영평군(1828)|이욱]]은 도망가다가 [[골절|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의 설득과 주민들의 협조(?)로 결국 [[가마]]에 올라 [[궁]]으로 가고 결국 [[철종(조선)|철종]] [[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이 흥하게 되었다' 하여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11 00-48-22.jpg|width=100%]]}}} || || {{{#gold ''' 흥선대원군이 쓴 용흥궁 현판'''}}} || 원래는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즉위한 후 강화유수가 큰 [[기와집]]을 지어 확장했다. 참고로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1903년([[광무]] 7년) 이복 형 [[영평군 이경응]]의 [[양자(가족)|양자]]이자 [[누동궁]][* [[철종(조선)|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종가]].]의 종손 [[청안군(1851)|청안군 이재순]]이 중건했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받았다. == 건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SC06229.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37040.jpg|width=100%]]}}} || || {{{#gold ''' 용흥궁 사랑채'''}}} || {{{#gold ''' 용흥궁 안채'''}}} ||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사랑채와 정면 7칸, 측면 5칸의 맞배지붕 안채, 그리고 행랑채와 [[우물]], 대문과 후문이 있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건물의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창덕궁 연경당]], [[창덕궁 낙선재|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처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 용흥궁 공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용흥궁공원.jpg|width=100%]]}}} || || {{{#gold ''' 용흥궁 공원[* [[https://www.ganghwa.go.kr/open_content/main/bbs/bbsMsgDetail.do?bcd=report&msg_seq=11951|사진 출처 - 강화군 보도자료.]]]'''}}} || 근처에 궁의 이름을 딴 [[공원]] '용흥궁 공원'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용흥궁과는 걸어서 5분, 차타고 2분 거리에 있다. 2020년에 [[강화군]]에서 다시 리모델링했다. [[주차장]]을 옮겼고, [[잔디]]와 [[화강암]] 블록을 설치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용흥궁.jpg|width=100%]]}}} || || {{{#gold '''용흥궁 근처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 좌측에 보이는 한옥.] || 용흥궁공원 바로 옆에는 [[성공회]] [[강화성당]]이 위치해있다. 자세한 내용은 [[강화성당]] 문서 참조. [각주] ---- [include(틀:문서 가져옴, 4, title=철종(조선), version=209, paragraph=2)]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분류:강화군의 문화재]][[분류:잠저]][[분류:철종(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