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용인시)] ||<-6> [[용인시|[[파일:용인시 CI.svg|height=65]]]][br]'''용인시 행정구역 변천사''' || ||<-2> [[백제|{{{#fbe673 '''백제'''}}}]] ||<-2> [[고구려|{{{#c5b356 '''고구려'''}}}]] ||<-2> [[통일신라|{{{#fbe673 '''신라'''}}}]] || ||<-2> 멸오현[br]{{{-2 (滅烏縣, 1세기?)}}} ▶ ||<-2> 구성현[br]{{{-2 (駒城縣, 5세기?)}}} ▶ ||<-2> {{{-1 [[한주#s-1|한주]]}}}[br]거서현[br]{{{-2 (巨黍縣, 8세기)}}} ▶ || ||<-6> [[고려|{{{#670000 '''고려'''}}}]] || ||<-6> {{{-1 [[양광도]] [[광주시|광주목]]}}}[br]용구현[br]{{{-2 (龍駒縣, 944)}}} ▶ || ||<-3> {{{-1 [[양광도]] [[광주시|광주목]]}}}[br]처인부곡[br]{{{-2 (處仁部曲, 13세기 이전)}}} ▶ ||<-3> {{{-1 [[양광도]] [[광주시|광주목]]}}}[br]처인현[br]{{{-2 (處仁縣, 1232)}}} ▶ || ||<-6> [[조선|{{{#f0ad73 '''조선'''}}}]] || ||<-2> {{{-1 [[경기도]]}}}[br]용구현[br]{{{-2 (龍駒縣, 1392)}}} ▶ ||<|2><-2> {{{-1 [[경기도]]}}}[br]용인현[br]{{{-2 (龍仁縣, 1414)}}} ▶ ||<|2><-2> {{{-1 [[충주시|충주부]]}}}[br]용인군[br]{{{-2 (龍仁郡, 1895)}}} ▶ || ||<-2> {{{-1 [[경기도]]}}}[br]처인현[br]{{{-2 (處仁縣, 1397)}}} ▶ || ||<-4> {{{-1 [[경기도]]}}}[br][[양지군|양지현]][br]{{{-2 (陽智縣, 1399)}}}[* [[1362년]] [[안성군]]에 속했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 ||<-2> {{{-1 [[충주시|충주부]]}}}[br][[양지군]][br]{{{-2 (陽智郡, 1895)}}} ▶ || ||<-6> [[일제강점기|{{{#white '''일제강점기'''}}}]] || ||<-6> {{{-1 [[경기도]]}}}[br][[용인군]][br]{{{-2 (龍仁郡, 1914)}}} || ||<-6> [[대한민국|{{{#white '''대한민국'''}}}]] || ||<-6> {{{-1 [[경기도]]}}}[br][[용인시]][br]{{{-2 (龍仁市, 1996)}}} || [목차] ==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 [[백제]] 건국 후 백제의 땅으로서 멸오현(滅烏縣)이었다. 그러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의해 고구려 땅이 되면서 구성현(駒城縣)이 되었다. 551년 백제가 구성현을 수복하였으나 553년 [[진흥왕]] 때 [[신라]] 땅이 되었다. [[삼국통일전쟁]]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 때 거서현(巨黍縣)으로 개칭되었다. == [[고려시대]] == 944년 거서현이 다시 용구현(龍駒縣)으로 개칭되었다. 구 양지군 지역은 [[수원시|수주]](水州)에 속한 양랑촌부곡(陽良村部曲)이었다. 그러다가 1362년([[공민왕]] 11) 에는 [[안성시|안성]]으로 이속되기도 하였다. 13세기 초까지 처인 부곡이었지만,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를 전사시킨 업적으로 처인현으로 승격되었다. == [[조선시대]] == [[정종(조선)|정종]] 때였던 1399년에는 양량촌부곡이 안성에서 독립하여 양지현으로 승격되었다. [[태종(조선)|태종]] 때였던 1414년에 '''용'''구현('''龍'''駒縣, 現 구성[* 수지구와 기흥구를 관통하는 도로인 [[용구대로]]는 바로 이 이름을 딴 것이다.] 일대)'과 처'''인'''현(處'''仁'''縣, 現 남사면 일대)'을 용인현으로 통합하였다.[* 참고로 용인시 자체적으로 2014년에 '용인' 지명 600주년을 기념하였다.] 용인은 역사적으로도 교통의 요지였는데 [[구한말]] 때까지 존재했던 [[영남대로]][* '동래로'라고도 불렸으며, [[동래]]([[부산광역시]])-[[밀양시|밀양]]-[[대구광역시|대구]]-[[상주시|상주]]-[[문경시|문경]]-새재(조령)-충주-죽산-양지-용인-한양 구간에 해당된다.]가 거쳐가는 곳이었던데다 인천-수원에서 영동지방으로 가는 중간지점이기도 했다. 과거 영남대로가 지나갔던 때는 현재의 구성 지역(용인군)과 [[양지면]]([[양지군]])이 중심지였다[* 용인[[향교]]는 옛 [[용인시청]]이 있던 김량장이 아닌 기흥구 언남동에 있다. 양지면에는 [[1523년]] 세워진 양지[[향교]](대성전과 내삼문)가 있다. 향교는 국가가 주도하여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하고 [[공자]]와 여러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면서 지방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양지향교는 조선 전기 각 지방에 세운 공립 교육 기관으로, 향교가 위치한 곳은 구한말까지 각 고을의 중심지였음을 의미한다.]. [[1895년]] [[23부제]]가 시행되자 용인현, 양지현이 용인군, [[양지군]]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로 이 당시 '''[[충주시|충주부]]''' 관할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 충주부에서 경기도로 이속하여 용인, [[양지군]]이 되었다. 1896년 용인군 행정구역은 16면 136동이었고 수부지역을 읍내면에서 수여면 소학동으로 이전하였다. == [[일제강점기]] == 1914년 [[일본 제국|일제]]에 의해 자행된 [[부군면 통폐합]] 이전까지 '용인군'[* 현 행정구역 기준으로 [[수지구]] 전체, [[기흥구]] 전체, [[처인구]] 옛 용인읍(수여면) 지역·현4읍([[포곡읍]]·[[모현읍]]·[[이동읍]]·[[남사읍]]) 일대.] '[[양지군]]'[* 현 행정구역 기준으로 [[처인구]] [[양지면]], [[안성시]] 고삼면 일대.]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다가, 양지를 용인에 병합하여 현재의 행정구역이 만들어졌다. 추가로 죽산군이 [[안성시|안성군]]과 용인군에 분할 편입되면서, [[원삼면]][* 원일면, 목악면, 주서면, 광곡리.]과 외사면[* 고안면, 박곡면, 근일이면, 근삼면.](현 백암면)을 설치하였다. 또한 수진면[* 서봉동, 죽전동, 성복동, 동막리, 손기리, 고분현, 신리, 정정리.]과 지내면[* 덕동, 영통, 상리, 하리, 의상, 의하.]이 통합되어 수지면이 되고, 수지면 죽전동, 동천동 일부 지역을 강제로 폐합해 [[광주시|광주군]] [[분당구|낙생면]] [[구미동(성남)|구미리]](현 [[성남시]])로 넘겨주어 현 [[구미동(성남)|구미동]] 및 [[동원동]][* 수지면 죽전동, 동천동 부분 면적이 광주군 낙생면 구미리로 속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용인군 수진면 동막리와 광주군 낙생면 원천동이 합쳐진 지명으로, [[동천동(수지구)|동천동]]의 이름 유래와 비슷하다. 용인군 수진면 머내 일부 지역이 현 동원동 관할. 당연히 원천동은 수원시 [[원천동(수원)|원천동]]과는 무관하다.]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내면 행정구역였던 [[영덕동|영통리, 덕동]]을 [[기흥구|기흥면]]에 넘겨준다. 그 해에 읍삼면 구성리(현 기흥구 구성동)에 있던 용인군청이 수여면(후에 용인읍으로 승격) 김량장리로 이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의 양곡수탈을 위해 건설됐던 [[수려선]][* 1930년 12월 1일 조선경동철조주식회사가 민간철도로 개통. 1946년에 국유화되어 운영. 6·25전쟁 초 인민군이 이용. 9·28 수복 후 영국군·터키군들이 수여선을 타고 중부전선으로 이동. 1972년 4월 1일 폐지.]이 현재의 기흥구 신갈동, 어정, 동백지구, 舊 용인읍내 일대[*역명 어정, 역말(간이역, 현 행정타운 부근), 용인역, 심평(간이역), 양지, 제일(간이역)]를 지나가 용인의 중심이 신갈과 김량장으로 옮겨지게 됐다. 1937년 수여면이 용인면으로 개칭되었다.[* 1909년 64.1에 불과했던 수여면의 민적밀도는 [[식민지]] 수탈에 필요한 경제 재편을 통해 중심지로 성장하여 1930년대 173.0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 [[일본 제국|일제]]의 수도 이전 계획 ===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제국 수도를 이전하려는 계획의 후보지 중 하나가 된 적이 있다.[* [[http://www.mlit.go.jp/kokudokeikaku/iten/service/newsletter/i_02_77_2.html|여기]](일본어)에 간략하게 조선 경기도 경성부 주변지구(朝鮮京畿道京城府周辺地区)가 후보였다고 나와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637870|기사]](한국어)] 정확하게는 현재의 [[한국외국어대학교/글로벌캠퍼스|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위치. 이유는 [[대동아공영권]]에 따라 일본 본토와 한반도, 만주국을 전체적으로 볼 때 용인이 거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입지 조건이 좋으며, 일본 본토 자체가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지라 이왕 힘 있을 때 입지 좋은 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관동 대지진]]으로 크게 데인 직후였다.[* 관동대지진 11일 이후 [[다이쇼 천황]] 조서를 통해 천도 자체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백지화.] 결과적으로 측량까지는 마쳐 곧 천도까지 가능한 상태였으나 각계각층의 반대에 부딪쳤고, 나중에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당연히 백지화되었다. "중앙계획 소안요강안"으로 알려진 이 계획은 극비리에 이루어진 일본의 국토 계획 중 하나로, 수도 이전 뿐만이 아니라 철도, 고속도로, 공업지구 등에 대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도 이전의 후보지는 후쿠오카, 오카야마, 경성 교외(모현 관청마을) 세 곳이었는데, 이 중 후쿠오카와 오카야마는 일본 본토 안에 있어 제국을 확장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일제의 수도이전계획의 주목적이 제국의 중심지이면서 교통이 편리한 곳에 천도하여 대동아공영권을 실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 세 후보지 중에서는 만주-한반도-동남아-일본으로 이어지는 일본 제국의 중심인 용인 쪽이 개연성이 높았다. 이 계획에는 '''조선인 수백만 명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 자리에 일본인을 채워넣는 인구 배정 계획이 포함되어 있는데, 만일 이 계획이 추진되었다면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상상 이상의 탄압이 병행되었을 것이다. 몰론 중앙계획소안이 만들어진 1943년에는 일본의 패배와 제국 해체가 가시화 되어 있었으므로, 영원히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계획이었다. == [[대한민국]] == [[파일:용인시 휘장(1979-1997).svg|width=30%]] 당시 사용된 휘장. 1963년, 고삼면이 안성군에 편입되었다. 1971년, [[영동고속도로]]가 수려선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개통이 되면서[* 그리고 수려선은 이듬해인 1972년에 폐선된다.] 기흥면 신갈리와 용인면이 지역 중심지로서 강화되었다. 1973년, 대통령령 제6542호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자행으로 변경된 [[수지구|수진면]] [[죽전동(용인시)|죽전리]]는 본래의 수지면으로 복구되었다. 1979년, 대통령령 제9409호 용인면이 용인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대통령령 제11027호 일제강점기 수지면으로 통폐합 된 지내면[* 용인군 지내면: 진위천으로 유입되는 황구지천의 분수계 마을들.]의 여수내, 가산천 유역인 이의리와 하리는 수원시, 남사면의 진위천 유역 진목리와 봉명리 일부는 평택시로 편입되었다.[* 현재 수원 이의동, 하동 [[광교신도시]], 평택 진위면 일대.] 1985년, 대통령령 제11772호 기흥면이 기흥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기흥읍 영덕리 일원 66만㎡가 수원시로 편입되었다.[* 현재 수원 영통동 일대.] 용인시는 근 20년 가까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유입된 도시이다.''' [[1995년]] 당시 약 24만명 인구의 전형적인 수도권 도농복합시였던 곳이 [[1996년]] 군에서 시로 승격되어[* 참고로 1996년에는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명칭이 변경된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칭되고, 용인자연농원이 [[에버랜드]]로 개명되었다. 이 시기 용인에 거주했던 사람은 1996년 용인시의 승격, 초등학교 개칭, 에버랜드 명칭 변경, 캐리비안 베이 개장 모두가 한 해에 일어난 것으로 인상깊게 남아 있다.] 서울의 [[위성도시]]로서 [[난개발/경기도|난개발]]이 되어 인구가 급증하였다. 다음의 표를 통해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보면 그 발전이 가파르다. || 연도 || [[용인시]] 인구 || [[평택시]] 인구 || [[안산시]] 인구 || [[안양시]] 인구 || [[부천시]] 인구 || [[성남시]] 인구 || || 1995년 || 244,763명 || 321,636명 || 504,615명 || 593,142명 || 779,745명 || 886,663명 || || 2000년 || 392,133명 || 356,103명 || 566,912명 || 581,166명 || 775,815명 || 924,390명 || || 2005년 || 681,344명 || 383,976명 || 679,011명 || 625,350명 || 855,359명 || 983,075명 || || 2010년 || 876,550명 || 419,457명 || 714,891명 || 621,714명 || 875,204명 || 980,190명 || || 2015년 || 975,746명 || 460,532명 || 697,885명 || 597,789명 || 848,987명 || 971,424명 || || 2020년 || 1,068,519명 || 520,649명 || 653,575명 || 561,069명 || 826,845명 || 941,527명 || 시 승격 이전 24만명에서 2015년 97만 5천명으로 거의 4배 가까이 상승하는 기염을 토해 기초자치단체 중 가장 높은 인구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위의 표를 보다시피 송탄까지 통합했던[* 1981년 송탄시, 1995년 평택시.] [[평택시]]를 2000년 이전에 제쳤고, 2000년부터 2005년 사이에는 [[안양시]]와 [[안산시]]를 제치고, 2005년부터 2010년 사이에는 [[부천시]]를, 2010년부터 2015년 사이에는 [[성남시]]를 제쳤다. 현 인구수 증가세대로라면 2015년부터 2020년사이에는 [[고양시]]를 제칠 것이 거의 분명해보이고[* 2020년 6월 기준, 6천명이 채 차이나지 않는다.], 만약 미개발 지역인 [[처인구]] 동부의 면 일대까지 대규모 개발이 된다면 [[수원시]]를 제치는 것도 가능해 보일 정도이다. 다만 이건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볼 수 있는데, 도농복합시 개념 도입 이전 여러 자치단체로 쪼개지고 해체된 [[시흥군]]과는 달리[* 공교롭게도 위에서 비교한 시 승격 짬밥이 좀 되는 도시들인 [[안양시]], [[안산시]]는 모두 시흥군에서 갈라져 나온 도시들이다.] 1995년 도농복합시 제도가 도입되고 난 직후에 시로 승격한 덕분에 예전의 [[시흥군]]처럼 여러 지차체로 분리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행정구역 분리를 거치지 않고 인구 90만 명 돌파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 행정구역이 갈라지지 않고 통째로 시로 승격하여 [[1기 신도시]] 효과를 받은 [[고양시]]의 인구 증가 수준이 비견될만하다. 이런 높은 인구 증가로 인해 [[2004년]] [[대도시 특례]]를 받는 도시로 승격되었다. 또 기초단위 승격도 빈번했다. 1996년 수지면이 수지읍으로 승격되었고 내사면이 [[양지면]], 외사면이 [[백암면]]으로 개칭되었다. 2000년에는 구성면이 구성읍으로, 2001년에는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2005년 10월 31일에는 [[수지구]](수지출장소), [[기흥구]](구 기흥읍+구성읍)[* 용인시 3개 행정구로 개편되기 전 이 지역의 명칭을 관계자들은 옛 이름인 '구흥(구성+기흥)'으로 하자고 건의했지만 어느 [[삼성전자|삼성전자 기흥 공장]]에서 당시 구성읍의 인구는 적었고, 기흥읍에 있었던 삼성전자 기흥 공장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기흥'으로 하자고 내세워 기흥구로 굳혀졌다. 참고로 1983년 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농서리 산 24번지 일대에 들어선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기흥 단지는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통하고 있었다. 삼성전자에서는 기흥 공장이 반도체와 성분이 비슷한 '그릇이 흥한다'는 뜻을 가진 데 반해 구흥(驅興)은 '당나귀가 흥한다'는 의미라서 내심 지명 변경을 반대했었다.], [[처인구]](나머지 지역)의 일반구가 설치되었고, 포곡면이 [[포곡읍]]으로 승격되었다. [[2017년]] 12월에 [[모현읍|모현면]], [[이동읍|이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21년 2월에 남사면이 [[남사읍]]으로 승격되었다. 2022년 1월 13일 [[대도시 특례/특례시|특례시]]로 지정되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용인시, version=329)] [[분류:용인시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