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카이사르)] ||<-2> '''{{{#fecd21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br]{{{+1 Ἰωάννης Καντακουζηνός |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 || || '''{{{#fecd21 이름}}}'''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Ἰωάννης Καντακουζηνός) || || '''{{{#fecd21 생몰 년도}}}''' ||미상 || || '''{{{#fecd21 카이사르 재위 기간}}}''' ||1185년 ~ 1186년 || || '''{{{#fecd21 배우자}}}''' ||이리니 앙겔리나 || || '''{{{#fecd21 자녀}}}''' ||미하일 칸타쿠지노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의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 1185년 [[이사키오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를 수여받았지만 1186년 [[아센과 페터르의 난]] 진압에 실패한 뒤 은퇴했다. == 행적 == 14세기에 여러 황제와 [[데스포티스]]를 배출한 칸티쿠지노스 가문의 초기 구성원으로, 1170년 이전에 [[이사키오스 2세]]와 [[알렉시오스 3세]]의 누이인 이리니 앙겔리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루카스 크리소베르게스에게 "요안니스와 이리니는 7촌 관계이니 결혼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승인받지 못했다. 1183년 여름 [[안드로니코스 1세]]가 [[알렉시오스 2세]]를 몰아내고 황위를 [[찬탈]]한 뒤 잠재적인 정적으로 간주된 귀족들을 숙청했다. 이때 그 역시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실명형에 처해진 뒤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1185년 가을 이사키오스 2세가 안드로니코스 1세를 척살하고 황위에 오른 뒤 그를 구출하고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했다. 또한 이 때에 새 총대주교 니키타스 마운타니스에 의해 이리니와의 결혼을 비로소 허락받았다. 1186년 세바스토크라토르 직책을 맡고 있던 [[요안니스 두카스(세바스토크라토르)|요안니스 두카스]]가 [[아센과 페터르의 난]] 진압을 맡다가 황제로부터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그가 두 눈이 실명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새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칸타쿠지노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불가리아 반란군을 추격했으나, 어느 산채를 포위했다가 반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당했고, 반란군 지도자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는 그의 예복을 노획한 뒤 대중에 전시했다. 이 패배로 인해 황제의 질책을 받고 해임되자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은퇴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1184년 이사키오스 2세가 안드로니코스 1세에 맞서 니케아 시를 방어할 때, 테오도로스 칸타쿠지노스가 함께 했다가 니케아 시가 함락되었을 때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테오도로스가 그의 형제일 가능성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분류:카이사르]][[분류:칸타쿠지노스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