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려 왕조 봉사손)] 王勳 ? ~ [[1590년]]([[선조(조선)|선조]] 23) [[8월 20일]] [목차]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고려 왕조에 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개성 왕씨|개성]](開城)[* 동양군파-부사공파 18세.], 자는 대이(大而) 또는 충원(忠元). == 생애 == 왕순손(王順遜)과 [[청주 한씨]] 한승건(韓承乾)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승의랑(承義郞:정6품 문신의 품계) 내의원 습독관(內醫院習讀官)을 역임했다.[* 차남 왕중경(王重慶)이 1584년([[선조(조선)|선조]] 17) 별시 무과에 병과 7위로 급제했는데, 당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84_000829|무과방목]]에 보인다.] 이 밖에 관련 기록은 노년기인 16세기 후반에 편중됐다. 왕훈은 [[왕적(조선)|왕적]] 사후 숭의전 봉사손으로 '''전주 왕씨'''인 [[왕희(조선)|왕희]]가 선택된 것을 억울하게 여겨 1588년(선조 21) 임금에게 호소한다. 왕희의 개성 왕씨 행세는 당시 50년 가까이 됐는데, 왕훈이 노인이 돼서야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은 본관 조작이 그제서야 발각됐기 때문일 것이다.[* 왕희는 [[영녕공]]의 후손을 자처했다. 그러나 영녕공의 후손은 조선 건국 후 모두 성씨를 바꾸었으므로, 왕희가 같은 일족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왕희가 파직되고 이듬해에 왕훈은 봉사자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봉사자 후보로 지명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왕희(조선)|왕희]] 문서 참조.] [[선조(조선)|선조]]는 백발이 된 왕훈이 [[노망]]이 들지 않았을까 우려해 [[승정원]]에서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하게 했는데, 왕훈은 상대와 어긋나는 것 없이 말해 봉사자로 선택됐다. 왕훈은 조선시대에 개성 왕씨의 정파로 인정됐으며, 손자 [[왕곤]] 등 그의 직계 후손들은 [[고종(대한제국)|고종]] 시기 또는 그 이후까지 11대 이상이 숭의전에서 제사를 주관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연천군]]의 복원된 숭의전에서 개성왕씨중앙종친회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주관하고 있다. [[분류:조선의 관리]][[분류:개성 왕씨 동양군파]][[분류:159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