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목차] == 소개 == 王厚, 1154~1106 북송의 명장으로, 자는 처도(處道)이다. 왕안석의 신법당이 실각하고 구법당 집권 당시 토번에 넘겨주었던 하황[* 칭하이 성 시닝 시 일대][* 1073년 왕안석의 신법이 진행되던 시기 왕소가 하황 일대의 토번 부족들을 점령함으로써 하황을 되찾았으나, 1083년 서하와의 전쟁에서 대패 후 구법당이 집권하자 하황을 토번에 넘겨주었다.]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 [[왕소(북송)|왕소]][* 송 신종 시기 서하 공격의 일환으로 하황을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티베트로부터 하황을 수복한다.]의 차남. == 생애 == 어릴 적부터 아버지 왕소를 따라 군에 있었던 것 덕분에 강족들의 형편에 익숙하여 관직이 통직랑에 이르렀다. 이 시기 북송 조정은 하황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왕안석 신법이 실패로 끝난 뒤 구법당이 하황을 토번에 넘겨주었고, 송철종 시기 하황을 되찾으려 했으나, 이미 토번 수령 시파온이 하황을 점거하고 있었던 데다가 서하, 토번이 연합하여 북송에 저항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상소를 올려 포기할 수 없다고 만류하는 등 조정의 의사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성 연간 천거자를 의전부사로 교체하고 희하 공사로 일했다. 마침 토번에서 내분이 터지자, 재상이었던 [[장돈]]은 왕후의 하황 수복을 적극 지지했다. 이에 하주의 수장인 왕첨은 왕후와 함께 서한을 올려 군사를 지어 실지를 탈환하고자 했다. 원부 원년 유월에 군사를 거느리고 요새에 나갔다. 7월, 막천을 공격하여 많은 부락을 항복시켰다. 9월, 군사가 청당[* [[칭하이성]] [[시닝시]].]에 이르러 농핍이 항복하자 황주, 선주를 수복하였다. 황제가 조회덕(趙懷德)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왕후는 동상으로 승진한 뒤 문부사(門副使)와 지황주(知黃州)가 된다. 이윽고 강족의 다른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병력을 모아 왕후를 공격했지만 왕후는 당해낼 수 없었다. 조정에서는 황, 선의 두 주가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이 두 주를 조회덕(趙懷德)에게 지키게 하고, 왕후를 우내부솔(右內府率)로, 또 하주별가(賀州別駕)로 좌천시킨다. 숭녕 초년 [[채경(북송)|채경]]에 의해 옛 직위가 회복되었고[* 하황 수복은 신법당에서도 반대가 극심했으나, 채경은 이를 강행한다.], 이때 [[강족]]의 다라파가 대회덕의 동생인 계서라철을 중심으로 복국을 꾀하였다. 그러나 대회덕은 겁에 질려 황하 이남으로 도망쳤으나 각 부락에 붙잡혀 각 부를 통솔했다. 조정은 강족의 각 부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왕후를 안무사로 임명한 뒤 내객성사(內客省使)인 [[동관(북송)|동관]]을 보내 함께 보냈다.[* 여담으로, 강족 토벌 와중 동관이 송 휘종으로부터 궁에 불이 났다는 이유로 철군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동관은 황제가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고, 반란 진압 이후 그 조서를 보여주자 왜 황명을 위조했는지 묻자, 공은 부하들의 것이고 잘못은 동관 자신이 다 뒤집어쓰면 된다고 말했다.][* 신종 시기였던 1081년 서하에 내분이 일어나자 서하를 공격하려 했을 때, [[이헌(북송)|이헌]]을 감군으로 보내 군을 감독하게 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헌은 난주를 수복하였으나 각 장군들 간 단합이 되지 않고 군량 보급 문제로 인해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오로벌하는 실패--] 다라파는 조정의 군대가 곧 도착할 것을 알고 각 부(部)를 규합하여 대항하였다. 왕후는 대외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겠다고 선전하면서, 암암리에 부대의 전진을 명령하였다. 강족 군대의 경계가 허술해지자 왕후는 편장 고영년과 부대를 양분했다. 다라파의 세 아들이 수만 명을 이끌고 각각 요충지를 지키자 왕후는 군사를 이끌고 이를 격파해 다라파의 두 아들을 죽이고 막내아들 아몽만이 다라파를 만나 도망쳤고, 그는 틈을 타 황주를 공격했다. 이에 대한 전공으로 승위주단련사, 희하경략무마사가 된다. 숭녕 3년 4월 대군을 이끌고 황주에 진주하여 고영년에게 명하여 좌군을 이끌고 종수를 따라 북상하고, 장계명을 우군을 데리고 종곡에서 남쪽으로 나가지 말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고 수원으로 가서 종형천에서 합류할 계획을 세웠다.강족들은 군대를 종수에 접해 북산에 의지한 곳에 배치하고 계서라철은 황옥을 쌓고 큰 깃발을 세워 높은 곳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적은 왕후가 이끄는 중군의 기호를 보고 다투어 공격해 왔다.왕후 휘하의 군사들이 산에 올라 적의 배후를 공격하자 왕후가 직접 강노를 든 궁수를 이끌고 정면에서 적을 맞이하더니 강족 군대가 크게 패하고 달아났다. 우군이 물을 건너 공격한 것은 강족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바람은 동남쪽에서 불어왔고, 불어온 모래알이 적의 눈을 가리고, 적은 보이지도 않고, 또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이 전투에서 우군은 적수 4천3백여 명을 참수하고 3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라사 홀로 말을 타고 탈출했고, 어머니 구자 공주는 여러 적의 수령들과 산산 성을 열어 항복했다. 왕후는 계서라철이 틀림없이 청당으로 도망갈 것이라고 예상하여 밤새 뒤쫓으려 하였으나, 동관은 이미 늦었다고 판단하여 그 추격을 멈추었다. 계서라철은 나중에 군대가 청당에 도착하자 청당에서 하룻밤을 묵고 간 것을 알고 후회했다. 왕후는 대군을 이끌고 곽주로 향했고, 강인의 수령이 명을 내려 부중을 귀순시켰으며, 송나라 대군은 곽주로 진주했고, 왕후는 무승군 절도관찰유후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계서라철이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고영년이 전사하자 이미 귀항한 강족들은 대통하교를 불태우고 이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국경이 크게 흔들렸으나, 머뭇거리는 바람에 군기가 지체되어 영주방어사로 강등되었다. 이윽고 조회덕은 송에 항복을 하려다가 망설였고, 왕후가 편지를 써서 마침내 항복을 권유하여 왕후의 원래 관직으로 복귀했고, 입조하여 예천관 제거의 보직을 맡았다. 1106년 죽었고, 영원군 절도사(寧遠軍節度使)로 추증되었으며 장민(庄敏)의 시호를 받았다. == 평가 == 북송의 '중문경무(重文輕武)' 현상[*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하는 현상] 속에서 북송의 정치정세를 타파하고, 북송의 변방지역에 위엄을 세운 장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북송이 멸망한 후, [[왕소(북송)|왕소]]와 왕후 부자는 남송 사람들에게 악인으로 매도되었다.[* 신법당이 왕소, 왕후 부자의 하황 수복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왕안석은 왕소를, [[장돈]]과 [[채경(북송)|채경]]은 왕후를 적극 지지했다. 결과는 북송 말 재정이 바닥나게 되고 정병들이 서북 지역에서 소모되어 정강의 변으로 인해 북송 멸망.] == 기타 == 동관과 함께 [[강족]]을 평정하던 와중, 개봉에서 불이 나 휘종은 이를 불길한 징조라 보고 동관에게 철군을 명하는 조서를 보낸다. 왕후가 조서의 내용에 대해 묻자, 동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황상께서 서둘러 반란을 평정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에 왕후의 뛰어난 용병술로 강족 군대를 도륙낸 뒤, 희하난황로를 수복하게 되고, 더 나아가 황두회흘까지 정복하여 그 곳에 [[농우도호부]]가 설치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서하]]와의 전투에서는 패하여, 동관에게 뇌물을 바쳐 이를 숨겼다고 한다.[* 《송사》<서하전>에 나온 내용이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10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