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서진의 회북감군, rd1=왕침(서진), other2=동진의 우장군, rd2=왕침(동진), other3=고려 문종의 왕자 왕침(王忱), rd3=왕침(낙랑후))] [include(틀:진서)] 王沈 (? ~ 266) [목차] [clearfix] == 개요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의 [[위(삼국시대)|조위]]와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처도(處道)로 왕기(王機)[* [[왕기(삼국지)|왕기]]의 인물과는 동명이인이다.]의 아들이자 [[왕유]]의 손자. [[왕창(삼국지)|왕창]]의 [[조카]]. [[병주]] [[타이위안|태원군]] [[진양]]현 사람. == 생애 ==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종숙 왕창에게 양육되어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계모]]가 [[미망인]]이 되자 받들었고 효행과 절의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잘 썼으며, [[조상(삼국지)|조상]]의 부름을 받고 조상의 연속으로 중서문하시랑이 되었다. [[양호(삼국지)|양호]]를 조상의 일파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조상(삼국지)|조상]]이 살해될 때 면직되었다. 왕침은 오래된 관리라는 명목으로 화를 면하고 양호를 만난 뒤에 >나는 항상 경께서 일전에 말한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하니 양호는 >이것은 처음부터 저의 생각이 닿은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라고 했다. 이후 치서시어사, 비서감, 전저작이 되었다가 [[정원]] 연간[* 254 ~ 256년이다.]에 산기상시, [[시중]] 등을 역임했고 [[조모(삼국지)|조모]]가 학문을 좋아해 왕침은 [[배수(삼국지)|배수]]와 함께 동당의 강연에 자주 초청되어 글을 지었으며, 조모로부터 문적선생(文籍先生)이라 불렸다. 이 때 저작 활동을 하면서 [[순의]], [[완적]] 등과 함께 위서를 편찬했다. 조모는 왕침을 믿었기에 왕침, [[왕업#s-2]], [[왕경(삼국지)|왕경]]을 모아 같이 [[사마소]]를 없앨 계획을 세우지만 왕침은 왕업과 함께 그들을 신뢰했던 황제 조모의 [[통수]]를 치고 사마소에게 [[고자질]]하였다. 사실 이전에 [[왕릉(삼국지)|왕릉]], [[이풍(조위)|이풍]], [[하후현]], [[관구검]], [[제갈탄]] 등 전후 [[사마(성씨)|사마씨]]에 대항하여 [[반란]]을 [[수춘삼반|일으키다 실패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고]] 조모의 행동이 성공할 가능성이 영 낮았기에 조위 신하로써의 충성심만 제외하면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결국 조모는 [[가충]]의 사주를 받은 [[성쉬]], [[성제(삼국지)|성제]]에게 살해당했다.~~이번에는 줄을 잘 섰다~~ ~~황제를 팔아먹은~~ 공으로 안평후(安平侯)에 봉해지고 [[식읍]] 2천 호를 받았지만 세상 사람들로부터 불충을 저질렀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상서(관직)|상서]]로 옮겨졌다가 감예주제군사, 분무장군, [[예주]] [[자사(관직)|자사]] 등을 역임했고 예주에 있을 때 선정을 펼치면서 [[가규]] 이후의 법제 금령을 참조해 여러 곳에 시행해 선한 사람들은 그를 따랐고 왕침이 이들을 가르쳐 예주 9군의 선비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정로장군, [[도독|지절, 도독강북제군사]]가 되었고 [[오등작|다섯 등급]]의 제도가 생길 때 박릉후에 봉해지면서 차국[* 1만호, 2군, [[사병]] 3천명이다.]으로 받았다. 263년 [[촉한]]이 멸망할 때 오군이 위로 올라와 [[촉나라|촉]]을 구하려고 할 때 변경을 위협하자 왕침은 각지를 방어해 오군이 철수하자 이 공적으로 진남장군이 되었다. 사마염이 [[왕]]이 되었을 때 [[어사대부]], 수상서령, 급사중이 되었고 왕침의 재주와 명망은 당시에 표창되어 양호, 순의, 배수, [[가충]] 등이 왕침과 함께 의논했다. [[사마염]]이 [[선양]]을 받을 때 임금의 명을 보좌한 공으로 표기장군, [[녹상서사]]에 임명되고 산기상시를 더하면서 박릉군공에 봉해졌지만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아 현공으로 임명되어 식읍 1800호를 받았으며, 사마염이 국정을 왕침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266년 사망했다. == 위서와 평가 == 후일 [[배송지]] 주로 인용되는 [[위나라]]의 사서 위서[* [[진수(역사가)|진수]]가 서술한 [[정사 삼국지]]의 [[위서(역사책)|위서]]와는 동음이의의 위서다.]를 쓰기도 했는데 그의 불충한 행적과 더불어 조씨일가 '''미화와 [[역사왜곡]]이 너무 심해서 후세사가들이 대차게 비판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조비]]가 [[문소황후]]를 죽인걸 미화하고 문소황후 자체의 행적도 엄청나게 미화한 사례가 있는데 [[유송]]의 배송지는 "어찌 이 지경으로 사서를 썼느냐 이래서야 위서 [[후비]]들의 행적을 믿을수 있겠느냐"고 대놓고 비판할 정도였고 [[당나라]]의 유지기는 위서를 보고 사통 곡필편에서 "왕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첨하여 기술하였다"고 한후 "기록의 간적, 대필의 흉인"이라고 걸쭉한 욕을 내뱉으며 '''"시호(늑대와 호랑이)의 먹이로 던져넣어도 상관 없다"'''고 일갈했다. == 미디어 믹스 == || [[파일:external/kongming.net/wangshen.jpg]] || || 삼국지 9 || ||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277.jpg|width=400]] || || 삼국지 13 PK, 14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9]]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다가 [[삼국지 13]] PK에서 오랫만에 복귀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8, 무력 14, 지력 66, 정치 70으로 병법은 혼란 하나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3]] PK에서의 능력치는 58/14/66/70으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5배나 대폭 상향되었다. 특기는 상업 3, 문화 3, 교섭 2, 견수 1. 전수특기는 상업이고 전법은 기방약화. 일러스트는 간사해 보이는 얼굴로 왼쪽 손가락을 얼굴에 대고 있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8, 무력 14, 지력 66, 정치 70, 매력 40으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4배나 대폭 하락했다. 개성은 인맥, 사관, 공명, 주의는 명리, 정책은 묵수연구 Lv 3, 진형은 방원, 전법은 혼란, 친애무장은 [[배수(삼국지)|배수]], [[사마망]], [[양호(삼국지)|양호]], [[왕업#s-2]], [[왕창(삼국지)|왕창]], [[조모(삼국지)|조모]], [[종회]], 혐오무장은 없다. [[삼국전투기]]에선 조모가 [[그라함 에이커]]로 나옴에 따라 [[조슈아 에드워드]]로 패러디되었다. 다만 그라함의 부하였던 그가 여기선 자기 상관을 배신하는 것으로 나온다는 게 그렇지만 원래 조슈아는 그라함을 무시하고 나서다 죽는 캐릭터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런데 268년에도 살아있는 것으로 나온다!! 아마 2번 항목의 [[동명이인]]과 착각한 듯.[* [[왕침(서진)|왕침]], [[석포]]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석포를 모함한 [[왕침(서진)|왕침]]과 이 왕침은 엄연히 동명이인이다'''. 이 항목의 왕침은 '沈'이고 석포를 모함한 2번 항목의 왕침은 '琛'이다.] 정작 전투외편 7-2편의 타이틀 컷에서 왕침을 소개할 때는 분명 266년에 사망한 것으로 생몰년도가 나와있다. 소개컷에서는 공부를 잘해서 학문을 좋아하던 조모와 친해졌다고 언급되었다. 전투외편 7편에서 처음 등장.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 할 때 불러모은 3인 중 하나로 등장했지만 조모의 계획을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왕업과 함께 조모의 계획을 사마소에게 누설했다. 조모 사후 왕침은 [[위서]]의 저자가 되어 수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살다 갔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이후 전투외편 8편에서 의외로 재등장. [[왕조(삼국지)|왕조]]가 [[위나라|위]]에서 [[진(사마씨)|진]]으로 교체되며 표기장군에 임명됐다고 묘사됐다. 왕침 본인은 자기도 최상위층이 됐으니 배신하길 잘했다고 발언을 하기도 했다. [[분류:조위의 인물]][[분류:서진의 인물]][[분류:266년 사망]][[분류:타이위안시 출신 인물]][[분류:태원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