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fff '''중산충렬공(中山忠烈公)[br]{{{+1 王晙 | 왕준}}}'''}}} || ||<:> '''{{{#fff 작호}}}''' ||<(> 청원현공(淸源縣公) → 중산군공(中山郡公) || ||<:> '''{{{#fff 시호}}}''' ||<(> 충렬(忠烈) || ||<:> '''{{{#fff 성}}}''' ||<(> 왕(王) || ||<:> '''{{{#fff 이름}}}''' ||<(> 준(晙) || ||<:> '''{{{#fff 자}}}''' ||<(> 덕명(德明) || ||<:> '''{{{#fff 출신}}}''' ||<(> 창주(滄州) 경성현(景城縣) || ||<:> '''{{{#fff 부친}}}''' ||<(> 왕행과(王行果) || ||<:> '''{{{#fff 조부}}}''' ||<(> 왕유방(王有方) || ||<:> '''{{{#fff 생몰년도}}}''' ||<(> 653년 ~ 732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무장이자 재상이다. == 생애 == === 초기 === 본관은 창주 경성현이며, 이후 낙양으로 옮겼고, 아버지 왕행과는 장안 현위를 지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 왕유방(王有方)의 가르침 하에서 성장하였으며, 천성이 호방하고 학문을 열심히 하였다. 왕유방은 왕준을 기이하게 여기며 "이 아이가 마땅히 우리 집안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672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청원현위(淸苑縣尉)에 서임되었고 이후 전중시어사가 된다. 이후 삭방군의 원수 [[위원충]]이 출전했으나 패하고[* 701년에 [[퀼테긴]]에게 패하고 그에게 생포되었는데, 그 이후의 기록은 불명.] 그 죄를 부장 한사충(韓思忠)에게 뒤집어씌워 주살할 것을 명하였으나 왕준은 한사충이 위원충의 부장이며 병권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고 용맹도 있고 책략도 있으므로 한사충만 처벌해서는 안 된다며 이에 반대했다. 한사충, 왕준 둘다 풀려난 뒤에는 위남현령(渭南縣令)으로 전출되었다. 709년 계주(桂州, 현재 광서 계림)의 도독으로 부임했다. 그동안 계주의 주둔군은 형주(衡州, 지금의 호남 형양), 영주(永州, 지금의 호남 영릉) 등에서 군량을 보급받았다. 그러나 왕준의 부임 후 성곽을 쌓고 주둔군을 철수시키고 수리를 일으켜 수천 경의 둔전을 일구어 백성들을 풍족하게 했다. 나중에 왕준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부모의 무덤에 성묘하고 싶다고 주청하자 계주 백성들이 예궐하여 왕준이 계주에 계속 남기를 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은 왕준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를 1년간 유임시켰다. 그가 물러날 때 계주 백성들은 또 돌을 새기고 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 [[토번]] 전선에서 === 714년 홍려소경, 삭방군 부대총관(副大總管)으로 임명되고 안북대도호, 삭방도 행군대총관을 겸임하고 풍안, 정원, 삼수항성[* 내몽골 일대. 707년 [[장인원]]이 성을 쌓은 이래, 돌궐에 대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등의 군대를 통솔하였다. 왕준은 안북 대도호부의 치소를 중수항성으로 옮기고 둔전을 실시했으며, 얼마 후 태복소경, 농우 군목사(群牧使)로 임지를 옮겼다. 같은 해, 토번이 십만 명의 군사로 임조군(臨洮軍)을 침략하자 이에 맞서 2천의 부대를 지휘하였고 정병 700명을 골라 토번군 군복을 입히고 군을 나누어 밤을 틈타 토번의 군영을 기습하였다. 적과 5리쯤 떨어져 있을 때 왕준의 군대가 함성을 지르고, 후발대는 북을 치며 호응했다. 토번군은 당군의 주력이 달려온 줄 알고 공포에 질려 서로 죽이고 사상자가 막심했다. 이윽고 [[설눌]][* 714년 거란 전선에서 거란군과 맞섰으나 대패하여 삭탈관직 당하였다.]도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대래골에서 20리 떨어진 무계곡에서 토번을 가로막았다. 수십 리에 걸친 전투 끝에 야밤을 틈타 정병을 보내 다시 토번을 크게 무찔렀고, 이에 승승장구하여 조수까지 쫓아가 토번이 약탈한 군마를 되찾았다. 그 뒤 은청광록대부가 더해졌고 청원현남(淸源縣男)에 봉해졌으며 원주(原州)[* 지금의 영하고원] 도독을 겸하였다. 또한 왕준의 아들인 왕반(王班)은 조산대부로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주 대도독부 장사로 자리를 옮겼다. === 반란 평정 === 716년 [[묵철가한]]이 바이르쿠의 난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와중 바이르쿠의 패잔병들에게 암살당해 그 수급이 장안으로 보내졌고, 돌궐의 부락 대다수가 당에 투항하고 말았다. 묵철의 뒤를 이어 [[부구가한]]이 가한 자리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가한]]과 [[궐특근]]에 의해 부구가한 자신은 물론 묵철의 일족 모두가 주살당했다. 이를 알게 된 왕준은 조정에 돌궐의 부족들을 당나라에 귀순시켜 국경에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 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돌궐의 부족들을 황하 이남으로 이주시키도록 건의하였다. 또 돌궐을 내륙에 내려보내지 않고 황하가 얼어붙을 때까지 방치하지 않으면 변고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조정의 대답도 없이 돌궐 부락이 반란을 일으켰고, 왕준은 병주군을 이끌고 도하하여 이를 평정하라는 명을 받았다. 왕준은 오솔길을 헤치고 진군하여 말을 타고 돌진했지만, 뜻밖에 밤에는 눈보라를 만나 걷기 힘들었다. 왕준은 시간이 지체될까봐 하늘에 기도를 올렸고, 바람이 멎고 눈이 그치자 군대를 이끌고 질주했다. 이때 반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달아났고, 이를 추격하여 삼천 명을을 참수하였다. 전후 좌산기상시, 삭방도 행군대총관에 올랐다가 어사대부가 되었다. 720년, 수항성 부근에 흩어져 살던 부락들이 수항성을 공략하려는 소식을 들은 후, 그들을 중수항성으로 유인하여 주살하였다. 이후 병부상서로 제수되고 다시 삭방군 대총관(大總管)을 맡았다. 721년, 난지주(蘭池州)의 호인이었던 강대빈(康待賓)이 반란을 일으켜 6개의 주를 함락시키고 하주로 진격하자, 왕준은 농우 절도사 [[곽지운]]과 함께 반란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지만 왕준은 곽지운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서로 대립하였다. 왕준은 강대빈을 사로잡고 청원현공(淸源縣公)으로 진봉되었지만, 그해 9월에 곽지운이 이미 왕준에게 투항한 반군을 공격했다. 항복한 반군은 왕준이 자신들을 팔아넘긴 줄 알고 뿔뿔이 도망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왕준은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재주(梓州)[* 오늘날 사천성 일대]자사로 좌천당한다. === 만년 === 722년, 태자첨사로 복직한 뒤 중산군공(中山郡公)으로 진봉되었다. 723년, 현종이 북쪽을 순행할 때, 왕준은 이부상서 겸 태원부윤에 임명되었고 4월에는 [[장열]]의 뒤를 이어 병부상서, 동중서문하삼품이 되고 금자광록대부가 더해졌다. 5월에는 다시 삭방군 절도대사를 겸임해 하서·농우·하동·하북의 제군을 통솔했다. 그해 11월 당 현종은 남교에 나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었는데, 왕준을 이에 참석시켰다. 하지만 왕준은 계절이 꽁꽁 언 겨울이고 또한 이 틈을 타 돌궐이 침입할 것을 우려하여 사양한다. 이때 허주(許州) 자사 왕교(王喬)의 가노가 왕교와 은밀히 결탁하여 모반을 꾀하려 하자 현종은 [[원건요]]와 장열로 하여금 이를 조사하게 하였다. 왕준은 비록 이에 관계되지 않았으나, 지난번 조칙을 어긴 것을 구실로 기주(蘄州) 자사로 좌천당한다. 왕준은 726년 호부상서로 승진하고 다시 삭방절도사를 맡았으며, 732년에 70여 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상서좌승상에 추증된다. == 여담 == * 왕준은 웅장한 풍채로 인해 당시 사람들이 웅호(熊虎)의 상을 지녔다고 여겼지만, 한편으로 의리를 중시하고 격려하였으며 옛 사람의 풍채를 지녔기에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 712년 [[유유구]]가 봉주(封州)로 유배될 때 [[태평공주]]의 일파인 [[최식(당나라)|최식]]이 광주(廣州) 도독 [[주이정]]을 시켜 유유구를 죽이려고 했는데, 당시 계주 도독으로 있었던 왕준은 최식의 음모를 알고 유유구를 계주에 붙잡아두었다. 주이정이 왕준에게 유유구를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왕준은 여러 차례 주이정의 요구를 거절했고 최식이 유유구를 넘길 것을 요구해도 이를 외면했다. 유유구는 "그대가 재상의 명령을 거역하고 귀양가는 사람을 보호한다면, 형세를 능히 보전할 수 없고 연루될 것이오."라며 자신을 광주로 보낼 것을 염려하자, 왕준은 "그대가 지은 죄는 절교할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공으로 인해 죄를 얻는다면 아쉬울 것이 없소!"라고 대답하며 유유구를 광주로 보내지 않고 계주에서 보호해주었다. == 평가 == >당대 문무를 겸하였던 자는 [[이정(당나라)|이정]], [[곽원진]], [[당휴경]], [[장인원]] 이외에 왕준이 있었다. >----- >[[채동번]] == 참고자료 == * 『[[구당서]]』 * 『[[신당서]]』 * 『[[자치통감]]』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53년 출생]][[분류:73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