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려사)] ---- [목차] 王珪 (1142 ~ 1228) == 개요 == 고려의 문신. 자는 숙개(叔玠)이고 원래 이름은 왕승로(王承老)다. 시호는 장경(莊敬). == 생애 == [[만세(고려)|영해공 왕만세]]의 7세손인 [[왕충(1078)|왕충]]의 아들로 태어난다. [[의종(고려)|의종]] 2년(1148) 7세의 나이에 동궁의 학우(學友)가 된다.[* 의종과 [[장경왕후]] 아들 [[효령태자]]는 이듬해인 의종 3년(1149) 4월에 태어나므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관직에 나가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군기주부동정에 임명된다. [[중서문하성]]에서 나이가 어린 점을 들며 이 인사를 논박하는데 의종이 "그 아버지가 임금을 보좌한 공이 있는데 어찌 상례에 구속될 수 있겠는가?"[* 其父有佐命之功, 豈可拘常例耶?]라며 묵살한다. 그렇게 의종 시기에 관직이 여러번 바뀌어 병부원외랑, 전중시어사를 지낸다. 의종 23년(1170) [[정중부]], [[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키자 왕규는 모친을 뵈러 가야 한다며 일찍이 떠났기에 화를 피한다. [[명종(고려)|명종]]이 즉위한 뒤에는 남경유수로 발령돼 선정을 베푼 일이 있다. 명종 3년(1173)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다가 진압되고 폐위됐던 의종은 이의방에게 죽는다. 이의방은 사서에서 '무릇 문신은 모두 주륙했다.'[* 凡文臣一切誅戮.]라고 표현할 정도로 연루된 문신들을 모두 제거하려 했다. [[김보당]]의 매부 이세연(李世延)이 연좌돼 죽임을 당하는데, 이세연의 누이가 왕규의 배우자였기에 왕규까지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왕규는 무신정변의 주도자 중에서도 온건파였던 정중부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 숨었고, 또 죽음을 피하게 된다. 정중부의 집에는 [[과부]]가 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왕규는 이 과부와 눈이 맞아 사통하다가 본처 이씨를 버리기에 이른다. 명종 4년(1174) 정중부 부자가 이의방을 제거한 뒤에는 권신의 사위라는 지위와 함께 복직한다. 명종 7년(1177) 왕경이 생일회사사로 [[금나라]]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주를 지나다가 정주중랑장 김순부에 의해 억류된다. 김순부는 낭장 용순을 죽이려고 했는데 용순이 개경으로 도망가자 지나가던 왕규를 인질로 삼아 정중부를 움직이려고 한 것이다. 왕규는 자신을 억류한 김순부로부터 뼈아픈 말을 듣는다. >공은 사대부 출신(衣冠之族)인데 지금 전처를 배반하고 권세가에 결혼해 의탁함으로 구차하게 살기를 꾀하니, 명분과 의리는 이미 이지러졌구려. 장차 무슨 낯으로 사대부들과 함께 조정에 서려는 것이오?"[* 公, 衣冠之族, 今背舊室, 托婚權門, 以圖苟活, 名義已虧. 將何顔, 與士大夫, 共立於朝乎?] 문신인 왕규가 본처를 버리고 정중부의 딸과 결혼함으로 무신들에게 영합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를 들은 왕규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의주분도관 왕도(王度)가 김순부를 설득한 끝에 왕규는 풀려났으며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명종 26년(1196) 11월 판각문사로 있을 때 [[팔관회]]에서 인주도령 중랑장 자충(子冲)으로부터 무례한 인사[* 길게 읍([[揖]])할 뿐 배([[拜]])하지 않았다.(長揖不拜)]를 받는다. 자충은 다른 북계의 도령(都領)들과 함께 팔관회 때문에 개경에 불려왔는데, [[이의민]]이 죽은 뒤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탐색하기 위해 소란을 일으킨 것이다. 자충이 도령들 앞에서 한 말에 따르면 자신을 죄주면 조정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을 두려워하는 것[* 如將罪我, 是朝廷有人, 否則是畏我也]이라고 한다. 자충은 탄핵된 끝에 벌을 받는데, 당시는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이 권력을 잡고 있었으므로 자충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 셈이다. [[신종(고려)|신종]] 때 최충헌의 반대파 숙청이 계속되는 중에도 왕규는 어사대부(1202), [[참지정사]](1203)로 승진을 거듭해 여러 번 [[평장사|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에 임명된다. [[희종(고려)|희종]] 원년(1205) 가벼운 병을 앓자 "족하다는 것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知足不殆]라며 글을 올려 은퇴할 것을 청한다. 은퇴한 뒤에는 유유자적하며 지냈고, [[고종(고려)|고종]] 15년(1228)에 87세의 나이로 죽는다. 고종은 사흘간 조회를 멈추고 왕규에게 시호를 내린다. [[분류:고려의 인물]][[분류:개성 왕씨]][[분류:1142년 출생]][[분류:122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