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attachment/tamamushi.jpg]] 다마무시노즈시(玉虫厨子, たまむしのずし) 옥충주자(玉蟲廚子) The Tamamushi Shrine [목차] == 개요 == [[일본]] [[호류지]] 대보장원에 안치된 유물로, 안에 불상을 모시는 불상궤, 즉 나무로 만든 궤짝의 일종이다. 높이는 226.6 cm로 꽤나 크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7세기에 제작된 듯하다. 원래 [[스이코 덴노]](554-628)가 소유했다가 호류지로 넘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옥충주자(玉蟲廚子)'란 명칭에서 옥충(玉蟲)은 [[비단벌레]]를 가리키는 일본식 명칭, 주자(廚子)는 본래 요리사를 뜻하지만 주방용 찬장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이는 단어이다. 일본에서는 주자의 의미가 파생하여 '수납함'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안에 불상 등 종교적 물품을 안치하는 가구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쓴다. 가구에 [[비단벌레]]의 껍질을 박아 장식했기 때문에 '옥충주자'란 이름을 붙였는데, 비단벌레를 1500마리 이상 사용해 만든 사치품이다. 일본에서는 [[다마무시노즈시]], 한국에서는 흔히 '옥충주자'라고 부르지만 뜻을 알기 쉽게 풀어서 '비단벌레불상궤'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유물이 중요한 이유는 거의 사라진 동북아시아의 고대 건축의 모습을 세부적인 면까지 파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서이자, 당시의 회화나 조각양식까지 볼 수 있다는 자료라는 점이다. 제작수법 역시 섬세하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일본의 국보]] 공예품 제34호. 천수백여 년이 지나 퇴색하여 지금은 검게 보이지만[*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 등 유물은 글리세린을 부어 변색을 막고, 변색을 막기 위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진품을 공개하지 않는다.], 원래는 금과 채색 등을 이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를 재현한 [[레플리카]]도 있다. 한일 양국의 학계는 옥충주자의 제작자와 제작국, 제작시기를 놓고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지만 딱히 정설은 없다. == 제작국과 제작자에 관한 논란 == 흔히 [[백제]]와 일본의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정황, 특히 [[호류지]]가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백제에서 영향을 받은 유물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다. 유물의 재료가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은 [[히노끼]]라는 점에서 일본에서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히노끼를 수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실제로 [[무령왕릉]]의 관은 일본산 금송과 삼나무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간혹 한국이나 중국에서 제작해 보냈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일본인이 일본에서 제작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아스카 시대]]의 일본의 높지 않은 공예 수준을 고려하였을 때 (일본의)외국에서 온 인력([[도래인]])들이 제작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도래인의 경우 어느 나라의 도래인이냐가 문제인데, 일본에서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류지]]나 [[시텐노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과 옥충주자의 건물 부분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어 백제계 도래인이 제작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와 심지어는 중국의 동시대 건축물이 하나도 현존하지 않고, 호류지나 시텐노지의 경우 백제 양식과 동일하다는 확증이 없어 확실한 답이 될 수 없다. 이외에도 불궤 부분의 금속 천불 조형이나 회화에서 백제풍(예를 들면 호류지 [[몽전]]의 구세관음상처럼 길게 늘여진 옷과 인물의 수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백제의 회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그 수법이나 조형이 고구려와 유사하단 점에서 고구려인이 제작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문화 역시 [[남북조시대]]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당시 중국 문화와의 공통점을 들어 [[양(남조)|양나라]]를 비롯한 [[남조]]의 인력이 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비단벌레 공예의 경우 과거에는 비단벌레가 일본에만 서식한다고 알려졌었지만, [[신라]]의 [[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와 같은 유물에서도 같은 수법이 발견되었고, 이후 한국에서도 비단벌레가 발견되면서 비단벌레만 가지고 나라를 특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외에도 각 지역의 양식이 혼재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일본에서 각 나라의 도래인들이 합작했다는 주장이나 삼국의 인력이 통합된 [[통일신라]]에서 제작했다는 주장 등도 있다. == 회화 부분 == 옥충주자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 본생담(本生譚)이라고도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자타카(Jataka)라고도 한다.]를 묘사한 [[본생도]](本生圖)가 있다. 한국에는 본생도를 그린 유물이 없지만 인도에서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중국에서도 5~6세기에 그린 유물이 [[막고굴|둔황 석굴]]에서 발견된다. 옥충주자의 본생도는 두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스스로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서 벼랑에서 몸을 던져 호랑이 밥이 되어준다는 내용 등이다. == 지붕과 공포 부분 == 지붕과 공포의 결구방식이 작지만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공포는 에도시대 까지도 꾸준히 일본 건축에 사용된 겅포양식인 하앙공포가 묘사되어 있으며, 그 형태는 매우 직선적이면서도 가느다란 것이 [[호류지]]의 하앙공포와 매우 유사하다. 지붕은 고대 동아시아에 쓰였던 꺾인지붕[* 팔작지붕이 아니다. 팔작지붕은 당나라대에는 들어서야 생긴 양식으로, 차이점이 있다면 팔작지붕은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려오지만 꺾인지붕은 내림마루가 끝나는 부분에 턱이 존재해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끊겨있다.]이며 심지어 현어도 묘사되어 있다. 추정 제작년도를 통해서 볼때 현재 한국 학계와 일본 한계 모두 옥충주자의 양식이 곧 [[아스카 시대]]와 [[백제]] 건축양식을 밝히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라고 추정중이다. [[분류:일본의 국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