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오평윤}}}'''[br]'''吳坪允[*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82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645&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1935년 수형인명부]]에는 吳'''{{{+1 平}}}'''允으로 기재되어 있다.]'''}}}}}} || || '''이명''' ||오평윤(吳平允) || || '''본관''' ||[[오(성씨)|군위 오씨]][* 중파 18세 평(坪) 항렬.] || ||<|2> '''출생''' ||[[1910년]] [[5월 21일]] || ||[[전라남도]] [[제주시|제주군]] 중면 오라호리[br](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동]]) || ||<|2> '''사망''' ||[[1951년]] [[7월 28일]] || ||[[제주도]]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77호 || || '''상훈''' ||건국포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10년 5월 21일 전라남도 제주군 중면 오라호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동)에서 아버지 오수병(吳壽柄, 1890. 10. 19 ~ ?. 7. 29)[* 제주향교 훈장을 지냈다.]과 어머니 [[여산 송씨]](1891. 10. 9 ~ ?) 사이의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6학년 때 중퇴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시]] 히가시구(東區) 산노미야히가시정(三宮東町)에 거주하면서 사이센(細線) [[합자회사]]에서 직공으로 근무했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1932년 12월에는 전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금속노동조합 오사카지부에 가입했고, 이 단체를 중심으로 노동운동 및 항일운동을 했다. 1933년 4월에는 [[일본공산당]]에 입당, [[오사카시]]위원회에 소속되어 오사카 지구의 문서 배포계(配布系)에서 활동했으며, 주로 동지를 규합하기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34년 1월 10일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취조를 받은 뒤 그해 2월 8일 기소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 10월 14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360일 통산)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80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12646&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고]] 3년 20일의 옥고를 치렀다. 1937년 10월 20일 출옥하였으며, 이후 귀국하였다. 1951년 7월 28일 제주도에서 별세했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당초 일본 오사카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6월 30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군위 오씨]][[분류:제주시 출신 인물]][[분류:1910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건국포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