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성 로마 황제)] ||<-2> '''신성 로마 제국 오토 왕조 2대 황제''' [br]{{{+2 '''오토 2세'''}}}[br]{{{+1 '''Otto II'''}}}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10px-Otton2.jpg|width=100%]]}}}|| || '''제호''' ||오토 2세 (Otto II) || || '''별칭''' ||오토 적제 (Otto der Rote) || || '''출생''' ||[[955년]][br][[독일 왕국]] [[작센]] || || '''사망''' ||[[983년]] [[12월 7일]] (28세)[br][[신성 로마 제국]] [[로마]] || ||<|6> '''재위''' ||[[신성 로마 황제]] || ||[[973년]] [[5월 7일]] ~ [[983년]] [[12월 7일]] ||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 국왕]] || ||[[980년]] [[12월 25일]] ~ [[983년]] [[12월 7일]] || ||[[로마왕]] || ||[[961년]] [[5월 26일]] ~ [[983년]] [[12월 7일]] || || '''배우자''' ||테오파노 ,,(972년 결혼),, || || '''자녀''' ||아델하이트, 조피아, 마틸다, [[오토 3세]] || || '''아버지''' ||[[오토 1세]] || || '''어머니''' ||[[이탈리아 왕국(중세)|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 || '''형제''' ||리우돌프, 리우트가르트, 하인리히, 브루노, 마틸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어]]: Otto II. (오토 2세) [[라틴어]]: Otto II (오토 2세) [[이탈리아어]]: Ottone II (오토네 2세) [[오토 왕조]]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2대 [[황제]] [clearfix] == 어린 시절 == 오토 2세는 955년에 태어났으며 삼촌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와 이복 형제 마인츠 대주교 빌헬름의 보살핌 아래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우선권을 잡기 위해 아버지 [[오토 대제]]는 961년 그를 [[독일왕]]으로 선출했고, 961년 5월 [[아헨]] [[대성당]]에서 왕관을 받았다. 나중에 967년 12월 [[로마]]에서 [[교황]] [[요한 13세]]에 의해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명목상의 직함일 뿐이었고, 오토 대제가 사망할 때까지 주요한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오토 2세는 972년 4월 로마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1세]]의 조카딸인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이때 [[포크]]를 비롯한 동로마의 식기 문화가 [[서유럽]]에 전해졌다. 그 이전까지 서유럽인들은 맨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었다. 아버지가 주도한 이탈리아 군사 원정에 참가한 다음에, 그는 독일로 돌아와 973년 [[오토 대제|아버지]]가 승하하자 5월 17살의 나이로 진정한 황제가 되었다. 오토 2세는 [[독일]]에서 제국의 힘을 강화시키고 이탈리아로 깊게 진출하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했다. == 독일 통치 == [[알자스-로렌|로타링기아(로트링겐)]]에서의 봉기를 진압한 다음에, 오토는 남독일에서 곤경에 처했다. [[바이에른]]의 [[공작(작위)|공작]] [[하인리히 2세]]가 [[슈바벤]] 공작령을 소유하는 것을 오토 2세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974년 하인리히의 어머니 유디트가 하인리히와 함께 황제에게 대항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고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공작(작위)|공작]]들, 프라이징 [[주교]] 아브라함과 성직자들, 전 황제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귀족들 역시 이 음모에 가담했다. 이들의 계획은 발각되어 쉽게 진압되었다. 또 오토 2세의 군대는 제국 황제의 힘을 실추시키려는 [[덴마크]]의 왕 [[하랄 1세 블로탄]]의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지만, 그의 확장은 보헤미아 인들의 저항을 불러와 975년 [[바이에른]]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실패했다. 다음 해 오토 2세는 2번째로 로타링기아의 질서를 회복했으며 [[하인리히 2세]]에게 레겐스부르크에서 보헤미아로 도망가라고 압박했다. [[바이에른]]은 결국 [[슈바벤]]의 [[공작(작위)|공작]] 오토 1세에게 할당된다. 977년에 그는 보헤미아로 다시 원정을 떠났다. 보헤미아의 볼레슬라우스 2세가 초기의 충성을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폴란드]] [[대공(작위)|대공]] [[미에슈코 1세]] 역시 항복했다. 그 동안 제국 서부에서 오토는 영지와 특권을 회복하려는 대영주들의 야심을 꺾으려고 시도했다. 973년에는 아버지가 몰수했던 몽스와 루벤의 땅을 되찾았다. 그리고 977년 [[로타리우스]]의 동생 샤를을 하 로트링기아의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자신의 공작령을 요구했던 [[프랑스]] 왕을 매우 화나게 했다. 오토가 바이에른을 다시 되찾으려는 하인리히 2세의 시도를 저지한 다음에, 로타리우스가 2만 군사를 통솔하여 로트링기아를 침공하고 5일 동안 아헨을 점령했다. 오토 2세는 우선 쾰른과 작센을 포기했다. [[프랑스]] 출신인 오토의 어머니는 로타리우스의 편을 들고 부르고뉴에 있는 콘라트의 궁정으로 옮겼다. 978년 9월 오토 2세는 3만 군대로 [[프랑스]]를 침공하여 보복하려고 했다. 그는 별로 저항을 받지 않았으나 군대에서 전염병이 돌아 파리 공격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중에 오토 군의 후방 부대가 [[프랑스군]]의 공격에 무너졌다. 후에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어 로타리우스는 로트링기아의 요구를 포기했고, 오토는 로타리우스의 아들 루이의 권리를 인정했다. == 이탈리아 통치 == 오토 2세는 이탈리아로 가야 한다고 느꼈다. [[요안니스 1세]]의 암살 이후 [[동로마 제국]]의 선임(先任) 황제가 된 [[바실리오스 2세]][* [[로마노스 2세]]의 장자로서, 그가 죽었을 때 너무 어려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1세]]가 실질적인 단독 황제로서 다스렸다.]는 서쪽 황제의 권위 아래 이탈리아의 전부를 가져와야 된다고 오토를 설득했다. [[독일]]의 내정은 빌리지스 대수상과 작센 [[공작(작위)|공작]] 베르나트 1세가 맡게 되었다. 오토 2세는 아들, 아내, 바이에른의 오토, 보름스, 메츠, 메르센부르크의 주교들, 많은 [[백작]]과 [[남작]]들과 함께 동행했다. 알프스 산맥을 통과해 파비아에서 어머니와 화해했다. 로마의 상황은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오토 1세]]가 선출했던 [[교황]] [[베네딕토 6세]]는 로마인들에 의해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었으며 그곳에서 974년에 선종했다. [[베네딕토 6세]]의 후계자를 자칭한 [[대립교황]] [[보니파시오 7세]]는 [[콘스탄티노플]]로 달아났고 수트리의 [[주교]]였던 [[베네딕토 7세]]가 교황이었다. 오토 2세는 981년 [[부활절]]에 베네딕토 7세의 인도로 환영을 받으면서 로마로 입성하였다. 오토 2세는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에 서유럽의 모든 귀족들과 제후들이 참가하는 궁정을 설치하려고 했다. 또 이탈리아 본토에 아랍인들이 침입하는 것을 멈추라고 요구했으며 무엇보다도 [[시칠리아]]의 [[에미르]]인 아부 알 카심의 침략 정책이 중지돼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980년 초에 오토는 피사의 함대에게 자신을 도와 이탈리아 남쪽에 수송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981년 9월 오토는 남이탈리아로 진군했다. 그러나 982년 칼라브리아의 아랍인들에게 패하였으며 베네치아를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로 삼으려 노력하다가 983년 12월 7일 로마 시에서 사망하였고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가 패배한 이후 데인족의 침공과 슬라브인들의 침략으로 엘베 강 동쪽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오토 2세는 죽기 전 베로나에서 제국회의를 소집해 아들 [[오토 3세]]에게 탄탄한 제국을 물려주었다. [[분류:신성 로마 황제]][[분류:독일 국왕]][[분류:이탈리아 국왕]][[분류:오토 가문]][[분류:955년 출생]][[분류:983년 사망]][[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분류:작센 주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