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발해의 유민]][[분류:몰년 미상]] '''烏濟顯''' 생몰년도 미상 == 개요 == [[발해]]의 유민. 후발해의 관리로 추정되는 인물로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또는 [[동란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생애 == >三年二月, 以入朝使南海府都督列周道爲檢校工部尙書, 政堂省工部卿烏濟顯試光祿卿. >청태(淸泰) 3년(936년) 2월, 입조한 남해부도독 열주도에게 검교공부상서를, 정당성 공부경 오제현에게 시광록경의 관직을 주었다. >- 『오대회요(五代會要)』 권30(卷三十) 발해(渤海) - [[열주도]]가 935년 11월(혹은 12월) [[후당]]에 입국한 기록으로 미뤄보아 보면 오제현도 같이 입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책부원구에서는 935년 11월에 열주도의 오기인 열주의(列周義)가 입조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오대회요에서는 열주도의 방문이 935년 12월로 기록되어 있다.] [[936년]] 2월 후당으로부터 시광록경(試光祿卿)의 벼슬을 받았다. 오제현의 후발해 관직 정당성공부경(政堂省工部卿)은 후발해의 중앙관직이 발해의 제도를 답습한 것으로, 공부란 발해의 정당성 소속 신부(信部)를 공부로 명칭만 바꾼 것이다. == 기타 == 열주도와 오제현의 기록을 끝으로 [[954년]] 후주에 투항하는 [[최오사]] 사이에 중국 - 후발해 간 교류 기록이 아예 없는데 후당에 사신을 파견한 발해부흥운동세력의 약체화[* 발해가 멸망당한 후 일어난 발해 유민들의 저항을 거란이 진압하고 요동 지역으로 발해인 사민을 실시했으며, 926년 혹은 934년에 발해세자 [[대광현]]이 유민 수 만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투항하기도 했다.], 후당 멸망 후 [[후진]]을 세운 석경당이 친 거란 성향인 점, [[흑수말갈]]이 교류를 방해한 정황 등이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