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해주 오씨]][[분류:강진군 출신 인물]][[분류:1899년 출생]][[분류:197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오원석(吳元錫) || || 호 ||춘재(春齋) || || 본관 ||[[해주 오씨]][* 시중공파 28세 석(錫) 항렬.] || || 생몰 ||[[1899년]][* 해주 오씨 대동보에는 189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1월 25일]] ~ [[1972년]] [[12월 21일]] || || [[출생지]]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 || || 사망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오원석은 1899년 1월 25일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에서 독립유공자 [[오기호]]와 정6품 사과(司果)를 지낸 [[청주 김씨]] 김경수(金敬洙)의 딸 사이의 네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청주 김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첫째 부인인 [[마(성씨)|장흥 마씨]] 마인석(馬寅錫)의 딸인 마종봉(馬淙奉)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그는 경성사립국성중학교(京城私立國星中學校)를 졸업하고 강진군 사립학술강습소의 강사를 지냈다. 그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소작문제에 자극되어 사회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1932년 강진군의 소작쟁의를 주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11월 조정구(趙政九)·김호기(金浩基) 등과 함께 무산아동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기 위해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할 것과 강진군 동면 호안공사(護岸工事)의 임금인상을 위해 노동쟁의를 펼 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1934년 2월 중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6년 1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8.15 광복]]을 맞았으며, [[광복회]] 전라남도지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다가 1972년 12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오원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