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오우치 가문 문장.svg|width=50%]] 오우치 가문의 [[가몬(일본)|가몬]]인 오우치 [[마름모]]([ruby(大内菱,ruby=おおうちひし)]). [youtube(fasW4si3nww)] [목차] == 개요 == 大内[* 이 한자에는 '대궐', '궁전'이라는 뜻도 있다. 교토의 황궁을 대내리(大内裏)라고도 부른 것이 그 예.] [[일본의 성씨]] 중 하나. 중세 일본 시기에 [[주고쿠]] 지방에서 자리잡고 세력을 떨친 [[다이묘]] 가문이였다. [[센고쿠 시대]]에도 독자세력화해서 패권을 다퉜으나 가문 내의 내분으로 한순간에 붕괴했고, 마지막에는 [[오토모 소린]]의 괴뢰로 이용당하다 [[모리 모토나리]]에게 멸망했다. == 내력 == 당시 다이묘로선 특이하게도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 중의 하나였다. 오우치씨가 자리잡은 [[주고쿠]] 지방이 한반도와 가까웠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도 관련 기록이 많이 나온다. [[조선]]과 교류를 시도했던 다른 [[다이묘]]들보다 뚜렷하게 기록이 많으며 조선 전기~중기 내내 오우치 가문과의 교류 기록이라든지 오우치에 대해 의논하는 《조선왕조실록》 기사가 수백건에 달한다. 외교적으로는 '''대내전'''(大內殿)이라는 표현[* '전'의 일본식 발음은 '[[토노|도노]]'였다. 다른 다이묘들도 '00전'이라는 표현을 썼다.]을 썼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대내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임성태자]] 문서도 참조. 조선과 [[무역]]을 하면서 백제의 후손이라 칭하고, 조선 초기에 친조선 정책을 취했다. 조선에서도 오우치씨를 백제의 후예로 인정하고, [[다이묘]]들 가운데서 특히 우대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정종 1년(1399)에 스오, 나가토, 이와미, 이즈미, 기이의 슈고인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예인지 확인해달라며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조상들이 묻혀있는 옛 백제의 땅을 [[봉토]]로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107010_006|달라고 청하기도 했고]] 조선 정부에서도 세종 시기 300결[* 세종조에 고친 '결'의 단위로 계산하면 약 90만평, 고려말 기준으로는 110~120만평쯤 된다. 조선 건국 이후로는 1결을 1헥타르, 또는 3천평 정도로 계산하면 얼추 맞다.]을 주는 것을 잠깐 진지하게 논의해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였는지 대신들의 반대로 흐지부지 되었다. 단종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이미 몇 번 거절당해서인지 이때는 "[[계보]]만 적어주시면 영지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라고 한 발 물러섰다. [[무로마치 막부]] 시대로 일종의 봉건체제하에 있었던 당대의 일본인과 중앙집권제가 확립된 당시 조선인의 인식차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팔만대장경]]》을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507020_004|달라고도 했는데]] 당시 여전히 [[불교]]가 유행하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숭유억불]]이 기조였기 때문에 《대장경》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잘하면 득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조정에서는 《대장경》의 가치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 번 주면 자꾸 달라고 할 것이므로 그냥 주지 말자고 해서 몇 차례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오우치씨가 수차례 《대장경》을 청구하자 세종이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12025_001|그럼 대장경판이라도 넘겨줄까 했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하기도 했다. 물론 일방적으로 달라고만 요구한 건 아니라, 몇 차례 [[선물]] 러쉬를 하였는데 그 선물들 중에선 [[돌려막기|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선물]] 받은 '''[[코끼리]]'''도 있었다. 다만 코끼리라는 것이 유지비가 여간 많이 드는게 아닌데다 코끼리가 뭘 먹는지 자세히 듣지 못해 값비싼 [[콩]]만을 지급하였는데, 유교사상을 중시하여 세금을 별로 안 걷는 조선 입장에선 꽤나 관리하기 빡셌던 모양. 그래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간이 동물원?-- 케어를 하여 외국에서 받은 선물을 열심히 관리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조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 오우치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주고쿠]]와 [[규슈]] 북부를 제패[* 주코쿠의 스오, 나가토, 아키, 이와미와 규슈의 지쿠젠, 부젠 6개국을 장악한 '''서일본 최대의 다이묘 세력이었다'''. 한때 수도 교토로 상경하여 무로마치 쇼군을 대리하는 칸레이 자리에 오른 적도 있었다.]한 강력한 [[다이묘]] 가문 중 하나로 존속했지만, [[센고쿠 시대]] 때 [[스에 하루카타]]의 쿠데타로 사실상 멸망하고, 허울만 남은 오우치 가문도 [[모리 모토나리]]에게 본가가 멸망하고 만다.[* 재미있는 것은 모리씨의 조상은 임성태자를 따라온 종자였다는 설이 있다(《[[간양록]]》). 즉 '''모리씨의 조상은 원래 오우치씨의 조상을 주군으로 섬겼다'''는 것.~~전형적인 [[하극상]] 루트~~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모리씨의 선조는 가마쿠라 막부의 창건 공신 중 하나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정치 참모였던 오오에노 히로모토였다. 오오에씨는 도래인 가계가 아니었다.] 다만 역사가 오래된 만큼 방계 가문들이 대단히 많이 남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직계와 가장 가까운 가문으로는 사실상 마지막 당주인 16대 오우치 요시타카의 유복자인 요시타네[* 다이네이지의 난으로 요시타카가 목숨을 잃을 때 그 측실이 요시타네를 임신한 채로 이와미까지 도망쳐서 낳은 아들이다.]로부터 이어지는 이와미 오이시씨(大石氏)와, 10대 당주 오우치 요시히로의 차남 모치모리로부터 이어지는 [[에도 막부]]의 후다이 가문 우시쿠 야마구치씨(牛久山口氏) 등이 있다. == 인물 == * [[오우치 요시오키]] - 스오 오우치 15대 당주. * [[오우치 요시타카]] - 스오 오우치 16대 당주. * [[오우치 요시나가]] - 스오 오우치 17대 당주이자 마지막 당주. * [[https://mindan.org/old/kr/front/newsDetaildec3.html?category=2&newsid=13769|오우치 기미오]] - 임성태자 45대손. 일본의 인쇄소 디자이너로 일하는 일반인이다. [[https://mindan.org/old/kr/front/newsDetaildec3.html?category=2&newsid=13769|이전부터 내려오던 족보와 학교에서 배우던 고대사를 통해 백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충청남도]] [[부여군]]에 방문하여 지역 발전에 써달라며 그간 모은 재산 일부를 기부한 것을 시작[* 이 때 일본어로 기부 의사를 밝혔는데 오우치 가문을 몰랐던 구청 직원들이 부여와 연고 없는 외국인이 지역발전을 위해 기부를 한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으로 매년 백제 문화제 및 백제 관련 행사에 참여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시]]의 [[원광고등학교]]에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 1400년만에 조상의 땅을 밟게 된 것이 매우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렸다. 익산시는 감사의 의미로 오우치 기미오를 명예홍보대사로 임명하였고 [[http://www.sotongsinmun.com/bbs/board.php?bo_table=newsall_05&wr_id=2357|2017년 그의 아내 오우치 다카코가 지병으로 별세하자 익산시에서 조문단을 보내어 위로를 표하였다.]] 오우치 기미오의 적극적인 행보는 역사 관련 프로그램에 종종 소개되면서 한국에서도 오우치 가문의 역사, 업적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 오우치 히사시(大內久) -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의 피해자 중 한 명. [[분류:성씨/일본]][[분류:오우치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