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오석준}}}'''[br]'''吳錫浚[* [[http://db.history.go.kr/id/ia_3138_2421|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吳錫'''{{{+1 俊}}}'''으로 등재되어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오석준(3.1운동).png|width=100%]]}}} || ||<-2>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 || '''자 / 호''' ||응홍(應洪) / 물와(勿窩) || || '''본관''' ||[[오(성씨)|함양 오씨]][* 21세 석(錫) 항렬.] || ||<|2> '''출생''' ||[[1876년]] [[12월 24일]] || ||[[경상도]] [[영양군|영양현]] 청초면 청기동[br](現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 798)[* [[오(성씨)|함양 오씨]] 집성촌이다. 출생지에 [[http://naver.me/xasnjf6T|오석준선생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http://db.history.go.kr/id/ia_3138_2421|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출생지 및 본적이 청기리 378번지로 기재되어 있다.] || ||<|2> '''사망''' ||[[1951년]] [[8월 7일]] || ||[[경상북도]] [[영양군]] || || '''묘소'''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선영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오석준(吳錫浚)은 [[1876년]] [[12월 24일]] 경상도 영양현 청초면 청기동(現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의 평민 가정에서 아버지 오세영(吳世寧, 1838. 11. 25 ~ 1906. 8. 25)과 어머니 [[의성 김씨]](1834. 7. 12 ~ 1893. 2. 4)[* 김성수(金晟壽)의 딸이다.]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중평리 편항마을에서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971|유동수]](柳東洙)·[[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121|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은 이어 영양군에 잠입, 입암면 대천동 이원오(李元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3월 25일 영양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하였는데, 오석준도 이 때 [[영양군]] 측 시위 주도 인사로서 이 회합에 참여하여 [[청기면]]과 [[입암면(영양)|입암면]]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장이 서기 전날인 24일 이강욱의 주도 하에 [[청기면]]에서 먼저 시위가 전개되어 이에 참여한 주민들은 밤늦도록 시위에 참여했다가 다음 날 [[영양읍|영양면]] 읍내 장터에서 다시 모일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한편 일본군 헌병분견소에서는 [[입암면(영양)|입암면]] 주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탐지하여 당일 아침부터 읍내로 들어오는 4개의 간선도로를 차단, 군경을 배치하고 삼엄한 경비를 하였다. 낮 12시 30분경, 각지로부터 6백여명의 시위군중이 10~20명씩 무리를 지어 영양읍내로 들어왔다. 이에 일본 군경은 읍 소재지 밖 2.5km 지점에서 일일이 신체 검색을 하여 되돌려 보내려고 했지만, 대부분의 군중은 이들의 경계망을 피해 영양읍내 시장으로 들어와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http://db.history.go.kr/id/hdsr_003_0030_0040_0030|#]] 오석준도 일본 군경의 만류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이미 들어온 시위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그 날 오후 5시경 시위군중이 1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시위군중들을 총칼로 위협하여 그 중 167명을 영양금융조합 창고에 가둬 개별적으로 조사한 후 모두 방면하였는데, 오석준만 홀로 주동자로 검거되었다. 오석준은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00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301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여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79&evntId=0034984010&evntdowngbn=Y&indpnId=000001555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뒤 상고하였으나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817&evntId=0034978654&evntdowngbn=Y&indpnId=0000010561&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대구감옥 안동분감에 수감되었다.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대구감옥 안동분감에 수감되었다. 그 뒤 대구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감옥 등지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6일 특사로 [[http://db.history.go.kr/id/ia_3138_2421|출옥한 뒤에는]] 교육 사업에 종사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교 전교로서 독립사상보급에도 진력하였다. 이후 광복을 맞이하였고 1951년 8월 7일 별세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오석준, version=20, paragraph=1)]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양군 출신 인물]][[분류:함양 오씨]][[분류:1876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