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개요 == ||[[파일:goguryeo_seong.jpg|width=100%]]|| ||[[고구려]] 지도와 오골성의 위치|| {{{+3 [[烏]][[骨]][[城]]}}} [[요동]]에 있었던 [[고구려]]의 옛 성으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요녕성]] [[단둥시|단동시]] 동북쪽의 봉황산성으로 비정된다. 고구려 시대에는 대성의 [[성주]]인 욕살이 파견되었다. 규모가 워낙 [[크고 아름다운]] 산성이다보니 후대에도 보존이 된 모양이다. 오골성으로 비정되는 봉황산성은 둘레 16km로 고구려 산성 중에서도 매우 큰 편에 속하며 내부에는 꽤나 넓은 평지와 식수원까지 있으며 구간에 따라 50m에 이르는 자연절벽까지 낀 험준함까지 갖추었다. 이렇다보니 요동지에 의하면 오골성은 10만대군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오골성은 [[랴오허|요하]] 일대와 [[요동반도]] 중앙에 뻗어있는 [[천산산맥]]을 지나 [[압록강]] 방면으로 진입할 때 거치게 되는 곳으로 전쟁시에는 요동 방어선을 후방 지원하는 거점이었고 요동방어선을 피해 압록강을 타격하는 움직임을 감제하는 중추지였다. == 역사 == [[고수전쟁]] 때는 [[수나라]] 맹장 [[설세웅]]이 답둔도군(軍)을 이끌고 공략을 시도한 곳이 오골성이었으며 [[우중문]]도 이 일대에서 낙랑도군을 거느리고 계책을 써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살수대첩|바로 발린건 함정]]~~ [[고당전쟁]] 중에는 645년에 [[백암성]]에 지원군 1만명을 파견하는데 여기 소속된 무장 [[고돌발]]이 [[당나라]] 맹장 [[글필하력]]과 [[일기토]]를 벌여 승리, 치명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당나라가 오골성을 공격하려는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요동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해 오골성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647년에는 당나라가 요동 방어선을 우회하여 압록강 일대를 타격하자 고구려 장군 [[고문]]의 지휘 하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군대 3만을 내어 [[설만철]]의 압록강 상륙군을 영격한 기록이 있다.[* 설만철은 수나라의 맹장 설세웅의 아들이며 글필하력의 라이벌이었다.] 이후 666년에는 [[연남생]]의 반란 때 오골성을 치다가 여의치 않자 [[현도성]]으로 물러났다는 기록이 나오며 고구려 멸망 후 한성의 [[검모잠]]과 함께 고구려의 유민이었던 [[고연무]]에 의해 [[고구려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자리잡기도 했다. [[설오유]], [[고연무]] 휘하 [[신라]]-[[고구려]] 연합군이 오골성 근처 개돈양에서 당군을 선제 공격해 [[나당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고려]], [[조선왕조]]에는 조선에서 요동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재활용되었고 [[열하일기]]에도 비중있게 언급되며, 열하일기에서는 이 봉황성이 고구려의 또 다른 평양이라고 비정하기도 했다. [[러일전쟁]]이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거점으로 활용된다. == 기타 ==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 [[연개소문]]에 대한 전승들이 남아있어 기행문 중에 종종 등장한다. 이 지역 사람들도 이 고장에서 난 인물 중 하나로 연개소문이 바위를 밟은 자국, 군사를 둔 자리, 살았던 성 등을 화젯거리로 삼았고 상을 만들어 모시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해 안시성이 근처에 위치한 유력한 후보지역 중 하나로 지목되기 때문에 [[양만춘]], [[추정국]] 등도 언급된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안시성주]]의 이름으로 양만춘을, 오골성주의 이름을 추정국으로 기재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들은 둘 다 안시성주의 본명으로 언급되는 이름들이며 명나라 야사나 소설에서 인용된다.] [[분류:고구려/건축]][[분류:성채/중국]][[분류:중국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