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삼국지의 지명, rd1=삼국지/지명/예주)] [Include(틀:대한민국의 폐지된 행정구역)] [목차] == 개요 == 영천군이라는 지역은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현재의 [[영천시]], 다른 하나는 현재의 [[영주시]]에 있었다. 공교롭게도 영주(永州)가 영천(永川)이 되고, 영천(榮川)이 영주(榮州)가 된 기간은 정확히 500년의 차이가 난다. == 永川郡 == 영천은 '[[골벌국]]'이라는 부족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서기 [[236년]]에 골벌국왕 아음부(阿音夫)가 [[신라]]에 항복해 영천 지역은 '절야화군(切也火郡), 신녕지역은 '사정화현(史丁火縣)'이 되었다. 그후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임고군'으로 고쳤으며, 신라 말기에는 다시 '고울부'라 불렀다. [[고려]] 초기에는 '영주'라고 불리다가 [[조선]] [[태종(조선)|태종]]때(1414년) '영주'를 오늘의 명칭인 '영천군'으로 바꾸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신녕군을 통합하였다. [[1937년]] 영천면이 영천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 금호면이 금호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7월 1일]] '영천읍'이 '[[영천시]]'로 승격되어 분리 되었다. [[1986년]] 화북면 남부(삼창출장소)가 화남면으로 독립하였다. [[1995년]] [[1월 1일]] 영천시와 영천군이 통합되었다. 이후의 정보는 [[영천시]] 문서 참조. === 관련 문서 === * [[영천시]] == 榮川郡 ==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영천군, [[순흥군]], [[풍기군]]이 [[부군면 통폐합|영주군으로 통합되었다]]. 영주(榮州)라는 이름도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같은 [[경상북도]] 도내에 같은 음의 영천군(永川郡, 현 영천시)이 있었기 때문에 혼동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천도 조선 초까지는 영주(永州)로 불렸다.[* 영주시와 비슷한 사례로 [[충청남도]] [[홍성군]]이 있다. 원래 홍주(洪州)였으나, [[일본인]]들이 같은 충청남도 도내의 [[공주시|공주]]와 발음상 헷갈린다고 '홍성'으로 개명당했다(...).그 외에도 [[광양시]]와 일본어 음이 같다고 흥양에서 강제개명 당한 [[고흥군]] 등 이런 사례는 숱하게 많다.] 영천군(榮川郡)과 합쳐진 옛 [[순흥군]]과 [[풍기군]]은 각 문서에도 나오지만, 원래 영남우로(대구~안동~죽령~제천~원주/충주)의 길목으로 크게 번성했고, 그 중에서도 순흥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라는 말의 유래가 된 '순흥 청다리'가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도호부까지 성쟁했던 순흥이 [[1457년]] 그 곳에 유배를 왔던 [[금성대군]]의 역모로 인해서 크게 몰락을 했고 이후 숙종 때 다시 설치되기까지 그 땅은 풍기군과 영천군이 나눠가졌다고 한다. 현재 영주시의 유명한 곳 중 하나인 [[소수서원]]이 옛 순흥 땅에 있지만, 세울 당시 이를 주도했던 사람은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인 점을 감안하다면... 이후, 신작로와 [[중앙선]] 철도의 개통으로 인해서 서울에서 가까워졌을 뿐 이젠 별 볼일 없는 시골로 전락하였다. [[1980년]] 영주군 영주읍이 영주시로 승격되어, 영주군의 잔여 지역은 '영'주와 '풍'기에서 한 글자씩 딴 [[영풍군(행정구역)|영풍군(榮豊郡)]]으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도농복합시|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른다. 이후의 정보는 [[영풍군(행정구역)|영풍군]], [[영주시]] 문서 참조. === 관련 문서 === * [[영주시]] [각주] [[분류:경상북도의 폐지된 행정구역]][[분류:1995년 폐지된 행정구역]][[분류:이름이 같은 지역/대한민국]][[분류:영주시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