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毖 (708 ~ 729)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귀족]]으로,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후예로, 증조부는 [[연남생]]이며, 할아버지는 [[연헌성]]이고, 아버지는 [[연현은]](淵玄隱)이다. 또한, 외할아버지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이다. == 행적 == 연비의 증조부인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매국노|지대한 공을 세웠는데]], 덕분에 연비의 아버지인 연현은 때까지 대대로 고위관직을 지냈다. 또한, 연비 역시 709년에 치천현 개국남(淄川縣 開國男: [[공후백자남]]의 맨 밑인 [[남작]])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 치천자(淄川子: [[자작(작위)|자작]])로 진봉되어 [[식읍]] 400호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연비의 나이는 겨우 '''2세'''였다.~~[[금수저]]~~ 후에 [[과거시험|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뛰어난 능력을 타고나 학문이 깊었고 [[병서]]에도 능했으며 또한 방술에도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기록상의 출처가 연비의 묘비명이니까 생애가 윤색되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729년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연비의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는 사서에는 남아있지 않으나 그의 아버지인 연현은이 남긴 묘지명인〈당고선덕랑효기위치천현개국자천군지명(唐故宣德郞驍騎尉淄川縣開國子泉君誌銘)>에 연비의 삶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당대를 살았던 연남생이나 연헌성의 묘지명에서는 고구려인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반면 이미 고구려가 멸망한 지 한참 뒤에 당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연비의 묘지명에서는 그를 당나라 수도 출신이라는 의미인 [[장안성|경조]] 만년인(京兆 萬年人)이라고만 하고 있다. 세대가 지나며 고구려인이었다는 정체성을 잃고 상당부분 당에 동화된 듯 하다. 연비 이후로는 당나라에 살았던 연개소문의 후손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연비, version=146)]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708년 출생]][[분류:729년 사망]][[분류:고구려의 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