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북이스라엘 국왕)] [[https://en.wikipedia.org/wiki/Jehoram_of_Israel#/media/File:Joram_of_Israel.jpg]] ||<#00008B> {{{#FFFFFF '''이름'''}}} ||<-4>여호람 혹은 요람 Jehoram || ||<|2><#00008B> {{{#FFFFFF '''출생'''}}} ||<-4>기원전 870년경 || ||미상 || ||<|2><#00008B> {{{#FFFFFF '''사망'''}}} ||<-4>기원전 841년경 || ||텔 이스르엘 || ||<#00008B> {{{#FFFFFF '''소속'''}}} ||<-4>미상 || ||<#00008B> {{{#FFFFFF '''재위년도'''}}} ||<-4>기원전 852년~기원전 841년[br]약 9년|| ||<#00008B> {{{#FFFFFF '''국적'''}}} ||<-4>[[북이스라엘 왕국]] || ||<#00008B> {{{#FFFFFF '''아버지'''}}} ||<-4>[[아합]] || ||<#00008B> {{{#FFFFFF '''이전 국왕'''}}} ||<-4>[[아하시야(이스라엘)]] || ||<#00008B> {{{#FFFFFF '''다음 국왕'''}}} ||<-4>[[예후]] || 북이스라엘 왕국의 9대 국왕. 여호람은 [[아하시야(이스라엘)|아하시야]]가 병사한 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합]]의 아들이었으며, [[사마리아(도시)|사마리아]]에서 1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아합이 만든 [[바알]]의 주상을 없앴지만, [[여로보암 1세]] 때부터 해 온 우상숭배는 버리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바알 신앙을 탄압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알 숭배자들은 여호람 시절까지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사람 어머니가 이세벨이다. '엄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여호람이 어떻게 어머니가 살아있는데 대놓고 바알 신앙을 탄압할 수 있을까? 물론 남유다에서는 그런 눈치 안 보고 할머니를 폐위한 왕도 있긴 했다지만 여호람의 어머니가 당대 부강한 도시인 시돈의 공주라는 게 문제다. 아버지인 아합조차 이세벨의 눈치를 봤다고 하는데 여호람이라고 다를지는...] 아합이 죽은 후 [[모압]] 왕 메사가 북이스라엘을 배반하자, 여호람은 모압을 함께 공격하자며 남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냈고, 여호사밧은 흔쾌히 응했다. [[에돔]] 광야 길을 거쳐 이동하면서 에돔 왕도 연합군에 합세했다. 그러나 군사와 가축을 먹일 물이 고갈되자 여호람은 좌절에 빠지고, 여호사밧은 하느님의 예언자가 있는지 묻고 [[엘리사]]에게 가자고 주장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엘리사는 개천을 많이 파라고 말했고, 다음날 아침이 되니 정말 물이 흘러 가득하게 되었다. 모압 왕은 햇빛이 물에 비쳐 물이 붉은 색처럼 된 것을 보고 연합군이 자기들끼리 싸워 흘린 피인 줄 알고 성급하게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모압 왕이 자신의 아들을 인신공양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돌아갔다.[* 이 싸움 후 모압 왕 메사가 승리를 주장하며 세웠던 [[메사 석비]]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서는 오므리와 그 자손이 성경보다 훨씬 길게 통치했다고 나온다. 단 예후가 타국에는 오므리 왕조의 후손으로 자칭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를 구분하지 못해서 그렇게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이후 북이스라엘에 가뭄이 들고, [[아람]] 왕이 쳐들어올 때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여호람은 위기를 겨우겨우 벗어났다. 이때 엘리사가 한 말이 압권. >그 때 엘리사는 장로들과 함께 집에 앉아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냈는데 그 전령이 오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말하였다. '''"이제 살인자의 아들이 내 목을 베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전령이 올 터이니, 미리 문을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단단히 막아야 합니다. 그를 보내놓고 뒤따라오는 상전의 발소리가 저렇게 들리지 않습니까?"''' 엘리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왕이 들이닥치며 말하였다. "보아라, 이 재앙을 야훼가 내렸다. 그런데 이제 내가 야훼에게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열왕기하 6:32~6:33(공동번역성서) 심지어 수도 [[사마리아(도시)|사마리아]]가 아람군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져 백성들이 인육을 먹을 정도였으나, >"야훼의 말씀을 들으시오." 하며 엘리사는 말씀을 전하였다. "야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일 이맘때쯤 되면 사마리아 성 문에서 밀가루 한 말을 한 세겔, 보리 두 말을 한 세겔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열왕기하 7:1(공동번역성서) 엘리사가 야훼에게 빈 덕분에 아람군이 철수했다고 성경에 나와있을 정도. 하지만 이때 [[엘리사]]의 말을 무시하고 불신했던 보좌관은 굶주린 백성들을 막다 깔려죽었다. 결국 [[예후]]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살해되었다.[* 이 장면이 구약성경 열왕기하 9장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여호람이 예후를 만나자 "예후 장군, 잘 되어가오?"라고 인사를 하니, 예후가 "네 어미 이세벨이 우상을 섬기며 음란을 피우고 밤낮으로 마술이나 일삼고 있는데 잘 되어가느냐가 다 무슨 소리냐?"라고 퉁명스럽게 외쳤고, 여호람은 예후가 반역을 한다고 외치며 놀라 전차를 돌려 달아나다가 예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출처: 열왕기하 9장 22~24절)] 그리고 여호람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인 [[나봇]]의 포도원에 던져졌다. 여호람의 죽음을 끝으로 북이스라엘에서의 오므리 왕조는 막을 내리고 이후 아합의 딸 아달리야가 남유다의 왕위를 찬탈하여 6년간 재위하지만 결국 폐위당함으로써 오므리 왕조는 완전히 멸망한다. 다만 예후는 왕조의 정통성 때문인지 스스로를 오므리의 후손이라 참칭한 흔적이 보이며 또 아달리야를 몰아내고 즉위한 요아스가 아달리야의 외손자였던 관계로 남유다에서는 모계로 오므리 왕조의 혈통이 흐르게 된다. [[분류:이스라엘 국왕]][[분류:기원전 870년 출생]][[분류:기원전 841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