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dmund Rossmann.jpg]] [[분류:1918년 출생]][[분류:2005년 사망]] [include(틀:2차 세계대전/전투기 에이스 116~139위)] '''에트문트 로스만(Edmund "Paule" Roßmann : 1918. 1. 11~2005. 4. 4)''' [목차] == 개요 == [[독일 공군]] 소속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640회 출격하면서 적기 93대를 격파한 [[에이스]] 파일럿이다. [[에리히 하르트만]]이 처음으로 편대를 짠 파트너로서 더 잘 알려진 로스만은 [[1918년]] 1월 11일, 레우스-게라 공국(Fürstentum Reuß-Gera)의 카슈빗츠(Caaschwitz)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에드문트는 18세가 되던 [[1938년]]에 [[루프트바페]]에 사병으로 징집되었다. == 서부전선 == [[전투기]] 조종을 지망한 그는 [[1940년]] 3월 1일에 전투비행 교육을 마치고 [[하사]] 계급장을 달고 자대로 가게 된다. 그는 제52전투항공단 예하의 제7전투비행단을 첫 자대로 배정받고 편대원 자격으로 [[프랑스]] 침공 작전과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싸웠다. 나중에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기 전까지, 에드문트 하사는 [[서부전선]]의 공중전에서 6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 동부전선 == [[1941년]] 초여름부터 [[동부전선]]에서 활동을 개시한 그는 해가 저물기 전에 32대까지 격추수를 늘렸고, 250회 출격과 49대 격추를 달성한 후에는 [[철십자 훈장|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듬해인 [[1942년]] 3월부터 6월까지는 잠시 후방에 있는 동부 보충전투비행단(EJGr Ost)으로 물러나 비행 교관으로 활동했다. 여름에 다시 전선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가 저물 때까지 자신의 격추 스코어를 2배로 늘려놓았고, 11월 29일에는 80번째 적기를 격추했다. == 전쟁 포로 == 해가 바뀐 [[1943년]]에 [[소위]]로 진급해 장교가 된 에드문트 로스만은 거듭해서 출격을 계속했다. 7월 9일, 로스만은 러시아 전선 너머 적진에 추락한 동료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 지상에 착륙을 감행했다. 동료 전우 지그프리트 세일러(Siegfried Seyler : 5대 격추) 소위를 찾아낸 그였지만 곧바로 러시아 군인들이 몰려와 사격을 가했고 두 조종사는 부상을 입고 함께 [[포로]]로 잡혔다. [[수용소]]로 보내진 그는 전쟁이 끝나고도 4년이 흐른 후인 [[1949년]] 10월에야 석방되었다. == 서훈 == 2급 /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1년 11월 6일) [[독일 십자훈장|독일 황금십자장]] (1942년 1월 22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2년 3월 19일) [[분류: 에이스 파일럿]][[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