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에르베[br](영어: Hervé, 그리스어: Ἑρβέβιος)|| || '''별칭''' ||프랑코포울로스[br](영어: Frankopoulos 또는 Phrangopoulos, 그리스어: Φραγγόπουλος)|| || '''출생''' ||미상|| || '''사망''' ||[[1063년]]|| || '''직위''' ||[[노르만]] 용병 대장|| || '''반란 대상''' ||[[미하일 6세]]|| [목차] [clearfix] == 개요 == [[동로마 제국]]의 반란자. [[미하일 6세]]에게 고용되었으나 직위 문제로 마찰을 빛은 끝에 반란을 일으켰다. == 생애 == 동로마 제국이 고용한 [[노르만]] 용병대 지휘관. 별칭인 '프랑코포울로스'는 '프랑크인의 아들'이란 뜻이다. 몬테카시노의 아마투스에 따르면, 그는 1038~1040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에 가담하여 시칠리아섬에서 사라센인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1050년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반란자)|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이끄는 용병대에 가담하여 [[페체네그]] 섬멸전에 참여했다. 1056년 [[미하일 6세]]에게 고용되었으나, 자신을 마기스테르로 임명해달라는 요구가 거절당하자 아르메니아 테마의 사유지로 돌아가 300명의 노르만 용병을 모집한 뒤, 1057년 봄 [[반 호수]] 인근으로 진군했다. 그는 그곳에서 나라를 세울 목표를 세우고 아르메니아인과 [[셀주크 투르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자리를 잡는듯 했으나, 알라트의 에미르 아부 나스르의 계략으로 사로잡혔다. 그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된 그는 미하일 6세와 화해하여 마기스테르의 작위를 얻었고, 뒤이어 즉위한 [[이사키오스 1세]]에 의해 동방의 스트라테고스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063년경 아미다의 튀르크인들이 전투를 피하기 위해 건넨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콘스탄티노스 10세]]에게 처형되었다. 후일 [[루셀 드 바이욀]]이 (보다 더 성공적이긴 했지만)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는다. [[분류:노르만족]][[분류:동로마 제국의 군인]][[분류:106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