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대 중국 구주)] [include(틀:후한 자사부)] [목차] == 개요 == [[고대]] [[중국]]의 [[행정구역]]들. 우리 발음으로는 다 같은 양주이지만 한자가 다른 양주가 3개나 있다. 마지막 양주는 거의 언급되는 게 없다시피 하고,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에 공존 한 적이 있었기에 이 두 개의 구분이 중요하다. 그래서, 강동 지역 [[손오]]의 근거지인 양주(揚州)와 구별하기 위해서 '서쪽의 양주' 로 부르는 별칭으로 '서량' 이라고 표기한다. == 揚州 == [[우(하나라)|우]] 임금이 세웠다는 구주의 하나로 [[장강]] 하류 유역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장쑤성]] 남부, [[안후이성]] 남부, [[저장성]], [[장시성]] 그리고 [[푸젠성]] 지역에 해당한다. 물론 실제로 우 임금이 양주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단 [[하나라]] 자체부터가 실존이 불확실할 뿐더러 하나라가 실존해 있다고 쳐도, 그저 허난성 일대에서 힘 좀 쓰는 나라였을 뿐, 장강유역은 춘추시대까지 황하와 정체성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왕의 구주는 행정구역이 아닌 지리적인 구분이었다. [[춘추시대]]에는 [[오나라]], [[월나라]]가 있던 지역이다.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나라가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에 망한 뒤로는 초나라의 땅이었다. [[전국시대]]에는 [[진(영성)|진나라]]에게 계속 밀리던 초나라가 마지막 수도로 삼은 곳이 양주 지역의 [[수춘]]이었다.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형산군(衡山郡), 구강군(九江郡), 회계군(會稽郡), 민중군(閩中郡)이 설치되었다. [[전한]] 시기에 양주가 설치되었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소속 군은 [[후한]] 기준 구강군, 단양군(丹楊郡), 여강군(廬江郡), 회계군(會稽郡), 오군(吳郡), 예장군(豫章郡) 6개 군이었다.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까지는 초기에는 호족들이 난립했으나 [[손책]]에 의해 장악된 이후 [[오(삼국시대)|손오]]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장강 이남에 대한 개발이 시작되었고, 손책이 194년 여릉군(廬陵郡)을 예장군에서 분리한 것을 시작으로 손권 시기에 파양군(鄱陽郡), 팽택군(彭澤郡)이 예장군에서 분리되었고 신도군(新都郡)이 단양군에서 분리되었다. 손권 사후 고장군(古鄣郡)이 단양군에서 분리되었다. [[서진]] 시대에도 양주 자체는 유지되다가 291년, 남부가 강주(江州)로 분리된다. 이후 [[송(남조)|유송]] 시기에 남은 양주에서 남부가 다시 동양주(東楊州)로 분리되어 나온다. 이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수나라는 한나라 때의 [[교주]] 지역까지 포함해 다시 양주를 만들었다. 이후 [[당나라]] 때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주 위에 [[도(행정구역)|도]](道)가 신설되었고, 양주 지역의 북부(회수와 장강 사이의 회남 지방)는 회남도(淮南道)에 속하게 되며 남부는 [[형주]]의 남부(이후의 상주(湘州))와 합쳐져 강남도(江南道)에 속하게 된다. 이 양주의 이름은 [[양저우시]]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 涼州 == 후한 13자사부 중의 하나. 현재의 [[간쑤성]] 서부에 해당한다.[* 간쑤성 동부는 사례교위부나 익주에 속했다.] [[옹주(중국)|옹주]]와 분리와 합체를 자주 반복했다. 전통적으로 진(秦)나라의 근거지. [[동탁]], [[마등]] 세력의 본거지였으며 서역 지배의 중심지였으며, [[오나라]]의 양주와 구별하기 위해[* 표준어에서의 두음법칙으로 인해 한글로 쓰면 구별할 수 없다.] 에 흔히 '''서량'''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일부 삼국지 배경의 서브컬처에서는 아예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량주'라고 써서 구분하기도 한다. == 梁州 == [[우(하나라)|우 임금]]이 세웠다는 구주의 하나로 현대의 [[쓰촨성]] 및 [[윈난성|운]][[구이저우성|귀]] 지역. 물론 우 임금의 추정 연대(서기전 23세기)에는 쓰촨 지역 역시 중국과는 따로 노는 독자적인 문명이 있었다. 춘추시대에는 [[촉나라]] 및 파나라가 있었다가 [[전국시대]] [[진(영성)|진나라]] [[혜문왕]] 말기인 기원전 318년에 진나라에 정복되었다. 진시황의 36군 중에서는 [[한중]]군(漢中郡), 촉군(蜀郡), 파군(巴郡) 3개 군이 해당된다. [[초한쟁패기]]에는 [[한고제]] 유방의 근거지였으며, 이후에는 [[익주]](益州)가 설치된다.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에는 [[촉한]]의 근거지였다. 이렇게 양주라는 이름은 잠시 묻혀 있다가, 263년 [[위(삼국시대)|위]]가 촉을 멸망시키고 난 후 익주의 동북 절반을, 즉 익주를 구성하는 큰 줄기인 파(巴)와 촉(蜀) 중에서 파 지역을 분할하여 양주를 설치했다.[* [[이엄]]이 [[한중]]을 지키게 되었을 때에, [[제갈량]]에게 익주를 분할하여 파주(巴州)를 만들고 자신을 파주 자사로 삼아 달라는 요청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와 비슷하다. ] 치소는 처음에 면양현에 두었다가, [[서진]] 시기에 들어서 남정현으로 옮겼다. 구체적인 설치 시점은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삼국지』 「삼소제기」에 나오는 것으로 264년 2월 5일이다. 다른 하나는 『진서』 「지리지」에 나오는 것으로 태시 3년, 즉 267년이다. [[분류:한나라의 행정구역]][[분류:삼국지/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