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양기하}}}'''[br]'''梁基瑕[* 梁基'''{{{+1 河}}}'''로 표기한 기록도 있다.]'''}}}}}}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양기하.jpg|width=100%]]}}} || || '''이명''' ||임창주(林昌周), 양인원(梁仁元) || || '''호''' ||하산(荷山) || || '''본관''' ||[[양(성씨)|남원 양씨]][* [[http://namwon.grandculture.net/namwon/toc/GC00601125|#]]] || ||<|2> '''출생''' ||[[1878년]] [[10월 8일]] || ||[[충청도]] [[논산시|연산현]] 두마면[br](현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 ||<|2> '''사망''' ||[[1932년]] [[2월 1일]] || ||[[만주국]] [[봉천성]] 관전현[br]{{{-2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1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독립군/한국|독립군]]을 이끈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양기하는 1878년 10월 8일 충청도 연산현 두마면(현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말 공주군수를 지내는 등 관리를 지내다 1910년 국권침탈이 벌어지자 관직을 버리고 서간도로 망명한다. 양기하가 망명한 곳에는 의병장이었던 [[유인석]]이 동료들을 이끌고 망명해 있었고,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의병 및 독립군 양성에 노력한다. 1915년에 유인석이 죽자 양기하는 남은 의병세력을 이끈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벌어지고 이 기회를 토대로 의병세력들을 모아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3.1 운동의 여파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양기하는 임시정부 관할의 남만주 독립군 단체들을 모아 광복군사령부를 결성하고 선전부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면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노병회(勞兵會)란 일종의, 노동을 통해 군자금 조달과 무장단체를 겸하는 집단이다.] 결성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양기하는 [[이승만]]의 노선과 맞지 않아 갈등을 벌였고, 불신임안까지 제기하는 일까지 벌어져 만주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거기서 [[참의부]] 교육위원장을 지내고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을 결성하며 만주의 무장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선다. 1932년 1월 19일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contentsId=GC05305302&localCode=krcn&nodeId=B2%2F1|신빈 사건]](新賓事件)[* 1932년 1월 19일 [[봉천성]] 흥경현(興京縣) 신빈보(新賓堡) 하북(河北)에 있던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국민부의 주요 간부들이 비밀 회의를 개최하다가 통화현(通化縣)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과 흥경현 관헌의 합동 습격을 받아 간부 10명 이상이 체포된 사건.]이 발생해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양기하는 강경론을 펼쳐 다시 한 번 지도부를 모아 단체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같은 해 2월 1일에 [[봉천성]] 관전현(寬甸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 콴뎬만주족자치현(寬甸滿族自治縣).]에서 [[만주군]] 및 일본 경찰대와 총격전이 벌어졌고, 교전 끝에 수십명의 동지들과 함께 [[http://db.history.go.kr/id/hdsr_013_0700|전사 순국했다]]. 그 후 1995년 6월 22일 중국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봉환해와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였다. == 참고 자료 ==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15~116p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계룡시 출신 인물]][[분류:남원 양씨]][[분류:1878년 출생]][[분류:193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