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등장인물, rd1=양규(고려거란전쟁), other2=삼국지의 인물, rd2=양규(삼국지))] [include(틀:고려사)] ||<-2> '''[[여요전쟁|{{{#670000,#fedc89 고려 여요전쟁 공신}}}]][br]{{{+1 양규}}}[br]楊規''' || || '''출생''' ||10세기|| || '''사망''' ||[[1011년]] [[3월 11일]][* [[율리우스력]] [[3월 5일]].][br](음력 1월 28일)|| || '''경력''' ||형부낭중(刑部郎中)[br][[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수도나 주요 변경 지역에 있었던 치안 및 군사 장관.][br]{{{-2 [[추증]]}}} 공부상서(工部尙書)[* [[상서성]] 소속 공부의 장관.]|| || '''공훈''' ||[[공신#삼한후벽상공신|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 '''아내''' ||은률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 || '''아들''' ||양대춘(楊帶春)|| ||<-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227&categoryId=49632&cid=49632|《고려사》 <양규 열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는 돌과 화살을 압도했고, 원수(= [[거란]]군)를 추격하여 생포하니 그 힘으로 국토를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들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궁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했다.'''" >---- >《[[고려사]]》<양규 열전>, [[현종(고려)|현종]]이 손수 작성하여 내린 글 中 [[고려시대]] 초기인 [[11세기]] 초엽에 벌어진 [[제2차 여요전쟁]] 때, 맹활약한 [[문관]]이자 무장이다.[* 양규는 정식 무관직을 역임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전쟁]] 중 후방에서 지휘뿐만 아니라 전장에 나가 직접 싸우기도 하는 등 용맹한 무장의 모습을 보였다. [[고려]]의 [[문벌귀족]] 사회의 특성상 고위급 장수들은 전부 [[문관]]이다. 우리가 무관으로 알고 있는 [[강감찬]] 역시 무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는 문관 출신 장수다.] [[거란]] 역사상 최고의 [[정복왕|정복군주]]이자 [[명군]]이었던 [[성종(요)|성종]] [[야율융서]]가 [[친정#s-3]]했을 때, 소수 정예의 [[고려]]군을 이끌고 각지에서 [[요나라|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잡혀가던 [[백성]]들을 구출해낸 [[영웅]]으로 《[[고려사]]》에서 [[유금필]], [[척준경]], [[김경손]] 등과 함께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큰 전과를 올린 [[고려]]의 [[용장]] 중 한 명이다. [[제1차 여요전쟁]]의 주인공 중군사 [[서희]]가 [[강동 6주|거란의 공세를 이겨낼 기틀을 마련]]했고, [[제3차 여요전쟁]]의 주인공 상원수 [[강감찬]]이 [[귀주 대첩|길었던 대거란 전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면 도순검사 양규는 둘 사이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인 [[제2차 여요전쟁]]의 주인공으로 고려의 [[멸망]]을 막아낸 구국의 [[명장]]이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교육]] 과정에서는 비중이 적어서 기껏해야 양규의 선전(분전)이라는 표현으로 뭉뚱 그려지기도 한다. 실제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거란군의 후방을 괴롭혀서 [[철수]]하게 만든 양규가 없었다면 거란이 [[승리]]하는 것을 넘어서 고려가 거란의 2차 침공 때 끝장났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거란의 3차 침공에서 다시 한 번 무너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근래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는 양규가 거론된 사료가 문제로 출제되고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주연으로 등장하는 등 인지도를 늘려가고 있다.] == 생애 == === 초기 === 대(對) 거란 전쟁 이전 초년기의 양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양규 열전>에 [[고려]]의 제7대 왕인 [[목종(고려)|목종]]의 치세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형부낭중이 되었다." 는 기록만이 파편적으로 남아있는데, 이를 근거로 추측하건대 제6대 왕인 [[성종(고려)|성종]]의 말년이나 목종 재위기간에 관직에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강조의 정변]]^^([[1009년]])^^으로 목종이 [[폐위]]당하고, 젊은 [[현종(고려)|현종]]이 옹립되자 그걸 명분으로 삼아 거란 황제 야율융서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 무렵 양규는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흥화진[*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함께 3천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양규의 전임 도순검사가 바로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고려)|강조]]였다. 양규는 강조의 후임으로 흥화진에 부임한 것인데 아무래도 [[정변]] 직후의 군 인사는 민감한 사안이었던 만큼 강조의 추천이나 승인없이는 이 요충지에 강조의 후임으로 부임하기는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이때문에 양규는 어떤 형태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 [[제2차 여요전쟁]] === ==== 전초전: [[흥화진 전투]] ==== 고려와 거란의 전격적인 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1010년 11월 17일부터 1주일간 '''거란의 성종 휘하 40만 명의 대군이 양규가 지키고 있었던 흥화진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양규 이하 3천 명의 고려군은 이 거센 공격을 막아냈다.'''[* 대충 환산해도 '''병사 1명당 적병 133명 정도의 차이'''를 막아낸 것이다.] 성종은 사로잡은 고려 농민들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아래의 편지를 보냈다. >"전왕 왕송[* [[목종(고려)|목종]]의 휘.]은 우리 거란을 잘 섬겼는데 강조가 목종을 [[시해]]했기에 이를 정벌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강조를 잡아보내면 돌아갈 것이고 안 그러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강조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른 사람들은 용서해준다." 이에 흥화진의 장수들은 정중한 말로 항복 권유를 거절했고, 이에 성종이 다시 흥화진 장수들에게 [[비단]] 옷과 은 [[그릇]] 등을 보내면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흥화진 장수들은 끝내 듣지 않고 정중한 말로 항복을 거부하는 서신을 또 한번 보냈다. 야율융서는 항복 권유가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20만 명의 병력을 무로대[* 오늘날의 의주 남쪽 부근.]에 주둔시킨 후, 자신이 직접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리고 '''[[통주 전투|통주성[* 오늘날의 [[평안북도]] [[선천군]].]의 삼수채에 주둔하고 있었던 강조의 30만 병력을 무너뜨리고]]''', 강조까지 포로로 붙잡은 뒤 [[처형]]했다. 이후 성종은 항복문을 죽은 강조의 서신으로 [[위조]]하여 흥화진으로 보냈는데, >"'''나는 [[현종(고려)|왕]]의 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고려)|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오.'''" >"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 >---- >야율융서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항복하라고 하자 답변한 말. 이후 서북을 사수하며 고려군의 승리를 뒷받침했다.《[[고려사]]》<양규 열전>에서 발췌. 양규는 '''"우리는 [[현종(고려)|임금]]의 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남하하던 거란군은 통주성을 공격했으나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했고, 근처의 곽주성[* [[평안북도]] [[곽산군]]]을 함락시켜 6,000여 명의 수비군을 남겼다. 곽주를 일종의 중간기지로 삼기 위함이었는데, 이는 빠른 직공을 위해 최소한의 중간기지를 마련하여 훗날에 대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거란군은 수도 [[개경]]으로 남하하는 길에 [[서경(고려)|서경]][* 옛 [[고구려]]의 수도이자 고려 제2수도였던 [[평양시]]]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리고 양규의 진짜 맹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대활약 ==== >전력이 계속 갉아 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거에요.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 >정명섭 | 《고려전쟁 생중계》 저자. <[[평화전쟁 1019]]> 中 서경이 거란군의 맹공을 받고 있었던 1010년 12월, 양규는 '''흥화진에서 7백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천 명의 군사를 수습'''했다.[* 통주에서 1,000명의 병사들이 합류해 1,700명의 병력이 되었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통주에서 수습된 병사들까지 합쳐 1,000명의 병사가 되었다는 의미인지 확실하지 않다. [[JTBC]] 창사 기획 <[[평화전쟁 1019]]>에서는 1,700명으로 소개했다.] 특히 흥화진 남쪽이 무로대에 주둔한 20만 거란 대군에 의해 철저히 틀어막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양규는 소수 정예의 병력으로 은밀히 부대를 운용해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통주까지 남하한 것이었다.[* 다만 무로대에 위치한 20만 명의 거란 대군을 뻥카로 보는 추측도 있다. 아무리 당시 거란이 최전성기였다고는 해도 뒤에 비록 여러 번 발렸다지만 언제든지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송나라|북송]]이 배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중원을 통일한 역대 황제들조차 동원하기 힘든 원정군 40만 명을 동원할 역량이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며, 한반도에 20만 명이라는 대군을 주둔시킬 거점이 있었는지도 불확실하거니와 이후 전쟁에서 무로대에 남았다는 20만 대군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물론 무로대에 주둔한 거란의 대군이 20만 명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병력을 남겨두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부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거란군이 점령한 중간기지인 곽주로 진격하여 야밤에 '''6천 명의 거란 수비군을 몰살시키고 성을 탈환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곽주성을 치고 들어갔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공격했는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공법이었을 가능성은 없고, 성내 고려인들의 내응을 통해 무너뜨렸거나 뭔가 책략을 써서 성 안으로 잠입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순식간에 곽주를 점령한 양규는 이후 붙잡혀 있었던 고려 백성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겨 통주성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곽주 전투야말로 여요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승리였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군의 손에 남아있었다면 보급로를 확보한 거란군의 공격에 서경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며, 만약 서경이 거란군의 손에 떨어졌다면 고려가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개경]]이 거란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어 전쟁을 수행할 역량 자체를 상실했을 것이다. 중간 보급기지를 상실한 데다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거란군은 그래도 서경에서 개경 사이의 길에 고려군이 없었기에 서경도 방치한 채 그대로 진격했고, 1011년 1월 1일, 거란 황제 야율융서가 수도 [[개경]]에 입성해 성을 불태웠으나 고려 국왕 [[현종(고려)|현종]]은 이미 남쪽으로 [[몽진]]을 떠난 뒤였다. 거기에 야율융서 휘하의 거란군도 꽤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의 충신 [[하공진]]이 '고려 왕은 이미 남쪽 수천 리 밖으로 피한지 오래다.'라고 과장하자[* 정확히는 왕이 강남으로 피했다고 말했으며, 이에 강남이 얼마나 떨어졌냐고 묻자 하공진은 수만 리나 떨어져 있어 얼마나 먼지 모른다며 거짓말을 했다.] 추격을 포기하고 곧 철수를 개시했다. 이들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가며 [[청천강]]까지 올라갔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고 있었던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들을 습격해 거란군 만 명을 죽였다. 그리고 때맞춰 양규도 거란군 예비 병력 20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던 무로대를 습격하여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출해냈다. >귀주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만여 급을 베었다. 양규는 무로대의 거란군을 습격하여 2천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천여 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추격하여 석령까지 가서 2천 5백여 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천여 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에서 싸워 천여 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천여 명을 되찾았다. 이 날 하루 동안 세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고, 다시 그들 선봉을 애전에서 맞아 싸워 천여 급을 베었다. >---- >《[[고려사]]》 <양규 열전>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서로 연락을 취하며 전투를 치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해 들어갔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 후미를 공략했다. 계속 이수(梨樹)에서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2,500여 명의 거란군을 죽이는 동시에 고려인 천여 명을 구출했고, 3일 뒤 여리참(余里站)에서 3차에 걸친 전투를 벌여 천여 명의 거란군을 사살하고, 고려인 포로 천여 명을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즉, 양규의 목적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거란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고려 백성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해내는 것'''이었고, 이는 양규가 이 전쟁에서 세운 최대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속해서 전투를 벌이며 거란군을 압박하다가 이윽고 김숙흥 부대와 합류했다. 이런 양규의 공적은 [[임경업]]이 [[병자호란]] 때, 요퇴(要魋)[* [[천명제|누르하치]]의 손자이자 [[숭덕제|홍타이지]]의 조카다.]를 공격한 것에 비견되어 폄하될 우려가 있는데, 비록 철수하는 병력을 공격한 것은 동일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달랐다. 임경업은 '''이미 화의가 다 끝난 상태에서 공격'''한 것이었고, 양규는 엄연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전 의사가 있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거둔 것이었다. 단순히 철수 중인 적을 쳤다고 폄하된다면 [[살수대첩]]이나 [[귀주 대첩]] 역시 철수하는 [[수나라|수(隋)나라]]군과 [[요나라|거란]]군을 공격한 것이며, [[노량해전]]도 철퇴하는 [[일본]]군을 공격한 것이니 별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철수 중인 군대가 약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전역|집에 갈 일만 남겨둔 상태]]에선 안 죽으려고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심리를 읽고 일부러 길을 터주는 전술도 있을 정도인데 더 설명이 필요한가?] 결정적으로 양규의 [[게릴라]]전은 언제 성종 야율융서가 친정하는 거란 본대와 맞딱뜨려 전멸할지 알 수 없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艾)'''에 '''밭 전(田)'''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실향민 출신 전원곤씨의 말에 의하면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전촌(전씨 집성촌) 부락 근방에 양규가 전사한 고개가 있었고, 거란군과의 전투 이후 마을이 폐허가 되어 인적이 끊긴 이후로 쑥만 무성한 쑥밭이 되어서 '''애전현'''으로 불렀다고 한다.]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000여 명의 수급을 벴다. 그런데 이 애전에 야율융서가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났다. 거란 황제의 최정예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야율융서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말 그대로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건 양규와 김숙흥에게 엄청난 전공인데 과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그야말로 고려가 나중에 3차 침공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었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병사로 복무하거나 전시에 필요한 군량미 등을 지원해 줄 수 있었으며, 양규와 김숙흥의 혼신의 힘을 다한 장렬한 혈투 덕분에 고려는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성종(요)|성종]] 야율문수노(= 야율융서)에게 굴욕감을 주었다. 명색이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가 후방에서 계속 찌르자 후방 포위라는 위기에,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물러날 수 없었으니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이 고려를 침략해서 빼앗은 포로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이들을 안치하기 위해 군현을 새로 설치했을 정도였다. 고려의 무인으로서 극한의 분투를 벌였던 양규 휘하의 부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도 그 결사적인 맹공에 입은 타격이 너무나도 컸던 데다가 큰 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을 지경이었다.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이 흥화진에서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맹렬하게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익사한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당시 반쯤 건넜다는 말을 보면 이미 요성종이 건너고 후미 부대가 아직 건너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때 정성을 비롯한 고려군이 기습하자 지칠대로 지친 요성종의 직속군조차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강을 건너느라 빠져 죽었을 것이다.[* [[살수대첩]]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널 무렵에 고구려군이 후미에서 신나게 두들겨 패서 쾌거를 이루었다는 사례와 비슷하다. 다만 압록강 동쪽 흥화진 앞에 거란이 쌓은 '보주'라는 성이 있는데, 이곳의 위치를 생각하면 살수나 귀주에서와 같은 피해를 입었을지는 알 수 없다.] 양규는 원군도 없이 '''1개월 사이에 모두 7번'''을 싸워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그가 구출한 고려인 포로는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 또한 그가 노획한 군마와 낙타, 병장기도 무수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양규를 비롯한 서북군의 피나는 분투는 거란군에게 무려 400km에 달하는 고립을 강요했고, 초반에 통주의 주력군이 패배한 여파로 파죽지세의 기세인 거란군에게 개경을 잃은 고려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저것이 또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라서《[[고려사]]》에서는 고립된 상황에서 이룬 성과라고 되어 있다. 자기가 알아서 거란군을 때려 부순 것이다.] 이들의 전공이 아니었다면 거란이 다 이긴 전쟁을 고려의 친조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으로 대충 마무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즉, [[병자호란]]처럼 "[[삼전도의 굴욕|직접 왕이 나와서 무릎 꿇으면 화친해 줄게]]"도 아니고, '''"나중에 오긴 온다 이거지? [[강동 6주]]도 나중에 돌려줄 거라 이거지? 알았어, 일단 돌아갈게. 나중에 진짜 [[강동 6주]] 들고 꼭 와서 화친해야 돼?"'''라며 생색만 내고 끝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립을 감수한 수도로의 전격전 및 수도 점령 성공이나 국왕이 적에게 사로잡힐 뻔했다는 점 등 여러모로 병자호란을 연상시키는 것이 '''[[제2차 여요전쟁]]'''이다.] 그토록 탐냈던 노른자위 [[강동 6주]]를 어영부영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고려는 무수한 노동력의 손실과 추가적인 배상 등에 시달리면서 파탄을 맞이했을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재기하려고 얼마나 피땀들여 노력했는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노동력의 중심인 많은 백성들을 잃고, 국토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장 [[인조]]가 [[숭덕제]]에게 항복하고 돌아올 때,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서 갇힌 와중에 왕을 부르며 울부짖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의 희생으로 고려는 비록 국토가 초토화되긴 했지만 막대한 노동력을 보전하고 배상을 면하는 등 추가적인 손실을 최소화함으로써 이후 [[제3차 여요전쟁]]에서 [[귀주 대첩|완벽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 사후 === 사후 양규는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임금의 조서라고 임금이 일일이 작성하진 않는다. 내용을 대략 정해주면, 실제로 글을 쓰는 건 한림원에서 한다. 워낙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현종이 일부러 직접 글을 쓴 것이고, 그래서《[[고려사]]》에서도 '''"직접 썼다."'''고 강조한다.]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고,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에게도 장군직을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게 했다.]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공신#s-1.1.2|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공신#s-1.1.2|삼한벽상공신]]은 [[태조(고려)|태조 왕건]]이 [[개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 뒷날 [[문종(고려)|고려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신흥사]]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아버지의 공도 있었겠지만 그 자신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으며, 이후로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물론 재상직에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면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와 비견될만한 공은 맞다. 일단은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이 전쟁을 막는 것이기도 하며 국가의 부흥의 제일 요소는 바로 서로 간의 응집력인 것을 보면 비록, 전쟁이라는 자극적인 요소에 묻혔지만 그도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노력해 나라를 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요에게 승리했어도 전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과거였는지라, 아버지인 양규가 고려를 구한 영웅이었다면 아들인 양대춘은 전쟁 이후 혼란스런 정세를 수습하고 고려의 황금기를 이끌도록 도운 영웅으로도 볼 수 있다.]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4년 2월엔 양규의 증손자 양제보(楊齊寶)가 등장한다. [[별무반]] 신기군(神騎軍) 직장(直長) 직위를 지니고 있었고, 예종에게 은가구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 평가 == 양규는 당대 [[고려]]의 지휘관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야전]]에서의 활약인데, 마치 현대의 [[특수전]]을 연상시키듯 소수의 특공대를 이끌고 인질 구출 · [[게릴라]]전에 나섰으며, 이를 통해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동시에 [[흥화진 전투]]를 지휘하고 곽주성을 탈환하는 등 [[수성전]]과 [[공성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이를 고려하면 양규는 다양한 종류의 전투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활약한 시기가 짧아 기록이 많지 않은게 아쉽지만 그 행적을 고려하면 '''[[한국]] 역사상 [[명장]]들 중 한 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술한 바를 토대로 양규의 활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거란(요) 제국 전성기 최고의 황제였던 성종 야율융서가 친정한 대군 400,000명의 공격을 고작 3,000명의 군사로 막아내어 흥화진을 수성하는 데 성공함. > >[2] 휘하의 날랜 용사 1,700명을 차출한 뒤, 그들을 특공대로 삼아 약 6,000명의 거란군이 지키고 있었던 곽주성을 공성하여 함락시킴으로써 적의 보급로를 완전 차단함. > >[3]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거란군의 유목민 부대를 상대로 1개월간 7번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하고, 적병 수천 명 이상을 죽임과 동시에 고려인 포로 30,000명을 구출함. > >[4] 양규와 그의 부대가 이룬 죽음을 불사한 활약 덕분에 고려는 이후 기사회생하여 [[제3차 여요전쟁]] 땐 한국 [[야전#s-1]] 역사상 가장 완벽한 승리라 평가되는 [[귀주대첩]]의 신화를 쓸 수 있었음. '''그 결과 [[요나라]]와 경쟁하던 [[여진족]]에 대한 종주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여 마침내 독자적인 세계관(해동천하관)을 확립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100년 이상 큰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에 [[중세]] [[동아시아]]의 균형자 국가로 우뚝 서게 됨'''.[* 물론 이때 양규는 이미 사망한 터라, 이후의 업적은 [[현종(고려)|현종]]과 [[강감찬]] 등 다른 인물들이 노력한 덕분이긴 했다.] 결과적으로 국가 멸망의 위기 상황속에서[* 양규의 활약 이전에는 고려의 야전군 태반이 강조가 지휘한 통주 전투에서 일순간에 괴멸당한 상황이었다. 거란군 주력이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양규가 그 배후에서 이런 맹활약을 펼치지 않았다면 서경의 항전과 현종의 파천은 실질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망국의 위기에서 기라성같은 활약을 펼친 것.] 소수의 얼마 안 되는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 기지를 확보한 후, 많은 적병을 주살한 끝에 적의 우두머리였던 황제 성종을 퇴각시키고, 그럼에도 마지막 한 명의 백성까지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놓음으로써 직분을 다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 대중매체 == === 다큐멘터리 === * 2019년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배우 이우승[* 2016년 [[KBS]]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역.]이 연기했다. 그동안의 소외를 씻어버리듯 [[주인공]]으로 등장했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무쌍]]을 펼친 끝에 자신의 결사대와 [[요나라|거란]]군도 모두 쓰러지고 홀로 서서 [[성종(요)|요성종]]을 쏘아보다가 거란군이 멀리서 쏘아대는 화살비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쓰러지는 모습은 장렬함 그 자체이다. === 드라마 === ==== <강감찬> ====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문신들이 주장하는 강화론에 맞서 주전론을 주장했으며, 거란의 군사 30,000명에게 12번의 야습을 단행해서 적장 13명과 5,300명의 적을 베어 거란군의 후군을 교란시켰다고 한다. ====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 ==== 2009년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배우 [[홍일권]]이 연기했다. 그래도 [[용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보여주는 모습은 [[인간흉기]]로 심지어 [[말(동물)|말]]과 교감이 가능해서 마음대로 말을 다룰 수 있다. [[야율분노]]를 이길 수 있는 실력이고, [[강조(고려)#천추태후|강조]]를 제압한 적이 있는[* 물론 진짜 실력으로 베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습이거나 무방비 상태이기는 했다. 드라마에서 묘사한 인물들을 평가했을 때, 강조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겨뤘으면 야율적로가 질 가능성이 높다.] [[야율적로]]를 1샷 1킬로 베어버렸고, 어지간한 장수 여러 명은 상큼하게 웃으며 베어버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에이스]]급 장수들과 싸울 때 당연히 진 적이 없다.[* [[성종(요)|황제]]를 죽일 순간까지 이르렀지만 순간 구하러 나온 [[소배압]]이 막는 바람에 아쉽게 황제를 죽이지 못했다.][* 김숙흥 역시 양규에게 정말 단 한끝 차이로 밀린지라 김숙흥 역시 야율적로 따위는 상큼하게 이길 가능성이 높다.] 최후에 그는 [[김숙흥#천추태후]]과 함께 [[선 채로 죽음|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는 순간]]에도 도망가는 [[요나라|거란]]군을 노려본다.[* 그때까지 두 사람 모두 밤새도록 1대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황제와 소배압이 궁수부대를 부른 것이다.][* 궁수부대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야율융서(요성종의 중국식 이름) 입장에서는 더 꾸물거렸다가 양규와 김숙흥 같은 고려군이 또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한가롭게 병사들만 보내서 양규와 김숙흥이 지치기를 바랄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죽기 전에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김숙흥이 "장군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상당히 멋있는 장면이다. 그를 죽여야 했던 황제도 적의 용맹에 대해서는 인정했는지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이다. 망작인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건질만한 것이 양규의 묘사이며 [[고려거란전쟁]]에서의 지휘관의 모습은 많이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맹장이나 용쟁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어 인상을 남겼다. ==== <[[고려거란전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양규(고려거란전쟁))] 2023년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배우 [[지승현]]이 연기했다. 주연급으로 굉장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 만화 === * [[고려]]사를 다루는 학습[[만화]]에서도 이들을 빼놓지 않으며 당연히 이들의 최후가 가히 [[무협지]]를 뺨치게 한다.[* 양규와 [[김숙흥]]이 돌아오는 요 [[성종(요)|성종]]의 군사와 마주치자 [[김숙흥]]이 "저승에서 뵙겠습니다, 장군."이라고 같이 결의를 다짐하고 함께 싸우다 전사하기 직전에 김숙흥이 "먼저 쉬겠소, 장군."이라며 먼저 쓰러지자 양규도 같이 싸워준 김숙흥에게 "수... 수고하셨소."와 같은 말을 한 뒤에 자신도 전사한다.] 고려사 학습 만화 장면 중 가장 비장미가 넘치며 가슴이 찡한 장면이라고 한다. * [[네이버 웹툰]]《[[백년게임]]》에 나오는 주인공 한시준이 사용하는 무기인 영월검이 설정상 양규 장군이 사용했던 검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했다. [[분류:1011년 사망]][[분류:고려의 공신]][[분류:고려의 군인]][[분류:전쟁 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