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수당시대/후궁]][[분류:윈청시 출신 인물]][[분류:719년 출생]][[분류:756년 사망]][[분류:중국의 자살한 인물]][[분류:홍농 양씨]][[분류:질식사한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마약류 식물, rd1=양귀비(식물), other2=다른 뜻, rd2=양귀비(동음이의어))] [include(틀:중국 4대 미녀)] ---- ||<-2><:> '''{{{#ece5b6 당현종의 후궁[br]{{{+1 貴妃 楊氏 | 귀비 양씨}}}}}}'''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f0043889_4a8be4d286f58.jpg|width=100%]]}}}|| ||<:>'''{{{#ece5b6 성씨}}}'''||양(楊)|| ||<:>'''{{{#ece5b6 아명}}}'''||옥환(玉環)[* 당나라 시대의 사료인 《명황잡록》(明皇雜錄)에 기록되어 있다.]|| ||<:>'''{{{#ece5b6 출생}}}'''||[[719년]]|| ||<:>'''{{{#ece5b6 사망}}}'''||[[756년]] (향년 37세)|| ||<:>'''{{{#ece5b6 신체}}}'''||155cm~165cm, 60~65kg[* 양귀비의 키와 몸무게는 역사적 기록과 발굴된 일부 문화 유적 기록을 토대로 추측한 것이다. [[https://www.163.com/dy/article/FOVRE0V405377QPC.html|출처]]]|| ||<:>'''{{{#ece5b6 종교}}}'''||[[불교]] → [[도교]] || ||<:>'''{{{#ece5b6 부군}}}'''||수왕 이모, [[현종(당)|당현종 이융기]]|| ||<:>'''{{{#ece5b6 가족 관계}}}'''||부친 양현염(楊玄琰), 언니 한국부인 양옥패, [[괵국부인]] 양옥쟁, 진국부인 양옥차, 6촌 오빠 [[양국충]] || [목차] [clearfix] == 개요 == > [ruby(一枝濃艶露凝香, ruby=일 지 농 염 로 응 향)] > 한 줄기 나뭇가지 농염한 이슬에 향기가 배어 > > [ruby(雲雨巫山枉斷腸, ruby=운 우 무 산 왕 단 장)] > 무산의 이슬비가 애를 끊네 > > [ruby(借問漢宮誰得似, ruby=차 문 한 궁 수 득 사)] > 묻노니, 한실의 누가 비길 수 있으랴 > > [ruby(可憐飛燕倚新粧, ruby=가 련 비 연 의 신 장)] > 아름다운 [[조비연|비연]]조차 다시 단장해야 하리라 >---- > [[이백(시인)|이백]], <청평조사>(淸平調詞) 8세기 초중엽 사람으로 [[현종(당)|당나라 현종]]의 며느리였다가 후궁이 되었다.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 황후 다음 서열의 [[후궁]]이었다.]라는 직함이 붙은 호칭이다.[* 비슷한 예시로 [[희빈 장씨]]가 있다. 더군다나 오빠의 이름이 장희재라서 '희'자 돌림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본명은 전하지 않으나 도사가 되었던 시절 '태진'(太眞)이라는 도호(道號)[* 도사가 된 뒤에 도사로서 사용하는 이름. 승려들이 사용하는 [[법명]]과 같은 개념이다.]를 사용했기에 사서에서는 본명 대신 '''양태진'''(楊太眞)으로 칭했고, 옛 중국의 사대부들도 흔히 '양태진'이라 불렀다. 아명은 일부 사료에 따르면 '''옥환'''(玉環)[* 당나라 시대의 사료인 《명황잡록》(明皇雜錄)에 양귀비의 [[아명]]이 '''옥환'''(玉環)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는 '''옥노'''(玉奴)였다고 하며 중국의 대중들은 양귀비를 흔히 '''양옥환'''이라고도 불렀다. 양귀비의 눈동자가 푸른색이었고, 그래서 안녹산과 같은 색목인이었다는 설은 후대 사람들의 상상과 추측에서 비롯되었을 뿐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 사서에서 양귀비는 그저 한족으로 나온다. [[돌궐]](쾩튀르크)과의 전쟁에서 [[힐리가한]]이 포로로 잡혀 죽은 후, 50년 동안 평화가 찾아왔지만, 가한만 사망했을 뿐 돌궐족 자체는 동화되지 않고, 그 정체성은 살아남았다. 50년이 지난 후 돌궐 제2제국이 등장하면서 서역이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갔기에 색목인들이 당나라에 이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 생애 == 양귀비의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 현 [[산서성]] 융지시(永濟市) 지역]으로 개원(開元) 7년(719) 용주(容州)[* [[광서성]] 지역]에서 출생했다. 중국에서 전하는 속설에 따르면 옥으로 된 고리{옥환(玉環)}를 손에 쥐고 태어났기에 부모가 아명을 '옥환'(玉環)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은둔해 살던 선비가 어린 태진을 보고서 >'''"이 아이가 성장하면 황후와도 같은 자리에 오르리라."''' 하고 예언했다는 말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집에서 살다가 개원 23년(735, 17세) 현종의 제18황자이자 무혜비 소생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 전 남편인 수왕 이모는 양태진과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가, 양태진이 귀비가 되었던 천보 4재(745)에 위소훈(韋昭訓)의 셋째 딸 위(韋)씨를 새 왕비로 맞았다. 이후 후처인 위씨와 다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무려 5남 22녀나 두었다.]가 되었다. 개원 25년(737, 19세)에 현종이 총애하던 후궁인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우울해진 황제를 달래주기 위해 환관 [[고력사]]를 포함한 여러 대신들은 현종의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며느리인 수왕비가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듣고 개원 28년(740, 22세),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했을 때 고력사를 포함한 대신들은 수왕비 양씨를 황제 앞에 소개해준다. 현종은 한 눈에 수왕비에게 반하지만 시아버지가 엄연히 아들의 아내이자 며느리를 강제로 데려와 후궁으로 삼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현종은 양옥환을 남편인 수왕 이모의 왕부에서 나오게 한 다음, 일시적으로 도관(道觀: 도교사원)에 출가시켰고, 옥환은 '태진'(太眞)이란 도호를 받아 여도사(女道士)가 되었다.[* 이는 아들 수왕과의 합법적인 이혼을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양옥환이 여도사가 되면서 과거 '''수왕의 아내이자 현종의 며느리''' 라는 신분을 세탁하는 것도 있었다. 더구나 당시 도교의 여도사들는 비구니나 수녀들과 달리 연애가 금지된 것이 아니었기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피하는 수단으로 여도사가 되는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56세, 양태진과의 나이 차이가 33살에 달했으니 당시 중국의 평균 수명을 따져보면 할아버지가 묘령의 아가씨와 정분이 난 꼴이었다. 게다가 시아버지가 머느리를 빼앗고, 졸지에 아내를 빼앗긴 아들 수왕은 아버지가 총애했던 무혜비의 친아들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른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후 천보(天寶) 4재[* 당현종은 744년부터 '년'(年) 대신 같은 뜻인 '재'(載)라는 글자를 쓰도록 명령했다. 이 조치는 [[당숙종]] 시절인 758년까지 지속되었다.](745, 27세) 때 현종은 정식으로 양태진을 귀비(貴妃)[* 측천무후 이후 사라졌던 작위였다. 당현종 당시는 황후 아래로 3명의 비(妃)가 있었는데 숙비, 덕비, 현비처럼 정해진 작호가 아닌 봉호를 수여받는 형태였었기에 여비, 혜비, 화비가 있었으나, 현종은 양귀비만을 위해 세 비들의 위에 서는 귀비 작위를 되살렸다. 당현종이 양태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로 책립했다. 비록 황후는 아니었지만 노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폐후 왕씨가 폐위된 후 현종의 황후 자리는 공석이었기에 사실상 양귀비는 황후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파일:external/www.e3ol.com/201111110121061450.jpg]] 양귀비는 외모는 물론 가무(歌舞)에도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눈치 빠르게 행동하는 총명함도 겸비했기에 현종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 잡았다. 현종은 그녀에게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 즉 얼굴만 예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지적인 여자'라는 뜻이며 현재는 양귀비를 상징하는 말로 자리잡았다.]라는 별명을 붙어 주었고, 동시대의 [[이백]]은 그녀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으며, 당대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에 꽃이 지었다며 '''수화'''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무혜비의 죽음으로 허해진 마음과 늦게 불타오르는 사랑에 빠진 현종은 양귀비에 대한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먼저 양귀비가 간택되자마자 승은 놀이를 단번에 폐지했으며 온천을 좋아하는 양귀비를 위해 온천 궁궐인 화청궁으로 조정을 옮겨 국정에 임했다. 또한 양귀비의 옷을 만드는 전문 인력만 무려 700명을 두었으며, 그녀가 남방(南方) 특산의 [[리치(과일)|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게다가 현종은 늘 틈만 나면 양귀비를 데리고 가서 달을 보는 놀이를 즐겼는데 이 놀이는 당나라 민간에도 널리 퍼져 오늘날 중국 중추절의 달보기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총애는 그녀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양귀비의 부모에게 각각 제국공과 양국부인이란 시호를 추증했으며, 천보 7재(748, 30세)에는 양귀비의 세 언니를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했다. 특히 이 세 국부인은 해마다 1천 관(현재 시세로 5억 원)이나 되는 후원을 받고 양귀비를 따라와 황실 잔치에 참여하는 등 황족 이상의 엄청난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이임보를 대신해 친척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이 재상 자리에 오르면서 양귀비의 많은 친척들이 [[고관대작]]으로 발탁되었고, 농서 이씨 황족과 [[통혼]]했다.[* 대표적으로 양씨 가문은 앙귀비와 현종과의 자녀가 없다보니 현종의 사후를 대비하고 황태자 이형(훗날의 당숙종)은 앙씨 가문의 확고한 지지를 받기위해 언니 한국부인 양씨의 딸 최씨를 태자의 장자인 광평왕 이숙(훗날의 당대종)의 정비로 시집보냈다.하지만 정작 이 혼사에 불만이 많던 광평왕 이숙은 황제가 된뒤 왕비 최씨를 추존도 하지도,최씨의 아들들을 태자로 지명하지도 않았고 측실인 심씨(훗날의 예진황후,당숙종 이괄의 생모)를 안사의 난때 행방불명이 된 뒤 아들인 서장자 이괄을 황태자로 삼고 황후 자리도 공석으로 해놓을 정도로 총애했다.] 훗날 [[백거이]]는 이런 상황을 <[[장한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 빼어난 미녀 3천이 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3천의 총애가 한 사람에 머무르고 > >(중략) > >姉妹弟兄皆列土 자매와 형제 모두가 봉토를 갖게 되니, >可憐光彩生門戶 아리따운 광채가 가문에 나는구나. >遂令天下父母心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겼네. 그러나 현종과 양귀비로 인해 특권을 얻은 세 자매와 양씨 일족은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당나라를 좀먹는 세력이 되어버렸다. 특히 그중에서 끝판왕은 양국충으로 양귀비의 뒷배만 믿고 각종의 국정 농단을 저질렀으며, 양귀비와 현종의 눈에 든 절도사 안녹산과 권력을 놓고 서로 반목하여 당나라를 파국으로 몰았다. 결국 천보 14재(755, 37세)에 양국충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세워 동북 변방의 번장 [[안녹산]](安祿山)이 [[안녹산의 난|대란]]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천보 15재(756, 38세)에는 안녹산의 군대가 수도 [[시안(도시)|장안]](長安) 가까이까지 치고 들어왔고, 귀비와 황제 일행은 사천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장안의 서쪽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진현례(陳玄禮)와 호위 병사들의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간신 양국충과 그 자매를 포함한 양씨 일족을 학살한 후, 모든 사단의 원흉인 양귀비를 처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항의를 했다('''마외병변'''). 물론 현종은 양귀비는 죄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변호했지만 워낙 병사들의 기세가 드세어 도저히 달랠 수가 없었기에 결국 양귀비는 고력사의 도움을 받아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 기타 == * 양귀비는 [[중국]]의 4대 미인(美人) 또는 5대 미인 중 한 명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언급되곤 한다. 다만 정사(正史)에선 양귀비를 '''자질풍염(資質豊艷)''' 즉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라고 묘사했고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 양귀비를 욕한 이유는 양귀비를 질투했기 때문이었다. 내려온 기록으로 미루어 봐선, 양귀비가 일방적으로 매비를 건들며 못 만나게 하여 매비가 양귀비를 매우 싫어하였다고 한다.]도 있었던 것 봐선 슬림하고 가날픈 체형이 미의 기준인 현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으로 추측된다. * [[음모(신체)|음모]]가 엄청나게 길어 무릎까지 닿았는데, 그래서 소변을 보려면 궁녀들이 젓가락으로 음모를 들어주었다고 한다. * [[경국지색]]이란 악평과 양씨 일가의 만행과 달리 양귀비 자신은 정치나 권력 투쟁에 관심이 없었고, 현종과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생활에 만족하는 편이었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오빠 양국충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녹산이 장안을 방문했을 때,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그의 외모를 재미있게 여겨 홀딱 벗겨 목욕시킨 후, 아기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훗날 안녹산이 간신(양국충) 토벌을 명목으로 [[안녹산의 난|대란]]을 일으키고 양귀비가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중국에서는 이때 양귀비와 안녹산이 '''사랑에 빠져''' 안녹산이 양귀비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대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희곡도 있지만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 [[야사(역사)|야사]]지만 양귀비는 [[겨드랑이]] 냄새([[암내]])가 심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시종이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닐 정도라, 양귀비는 항상 향이 나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당현종은 고질적인 [[축농증]]이 있어 양귀비의 암내를 몰랐다고 한다. * [[아편]]의 재료인 [[양귀비(식물)|양귀비]]는 당연히 그녀에게서 따온 이름인데, 마치 마약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것에, [[경국지색|양귀비에게 빠져서 나라를 피폐시킨]] 당현종의 모습이 매우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 당현종의 몰락에는 양귀비 한 명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이유들이 겹쳤지만, 양귀비 역시 원인이기도 하다.] * [[백거이]]의 유명한 시 <[[장한가]](長恨歌)>는 양귀비와 현종의 비극을 모티브로 했다. 이후 진홍(陳鴻)의《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등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양귀비와 당현종의 이야기는 로맨틱한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 원래 불타 죽은 사람은 양귀비가 아닌 시녀였으며, 양귀비는 도주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도망간 곳이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양귀비가 돛이 없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륙하여 땅에 쓰러졌는데, 야마구치현 주민들이 양귀비를 발견해서 구했고, 이후 거기서 더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전설을 기반으로 [[일본]]의 가수인 불세출의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가 양귀비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조차도 언론에서 이렇게 주장하여 원래 양씨라며 족보까지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계인 [[손정의]]가 자신의 성씨를 들어 조상 중에 중국계 혈통도 섞였다는 립서비스를 한 바 있었던 것처럼 조선시대 일부 양반들이 족보에서 성씨의 시조를 명망있는 중국계 인사들로 하던 유행에 맞물려 있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썼다는 설이 약간 더 타당하다. == 대중매체 == * [[일본]]에는 1955년 쿄 마치코(京マチ子)를 주연으로 한 다이에이와 쇼브라더스의 합작 영화가 있다. * [[대한민국]]에는 1962년 [[김지미]] 주연 <양귀비>와 [[도금봉]] 주연 <천하일색 양귀비>가 있다. 제작 밑 상영 당시 <양귀비>와 <천하일색 양귀비> 모두 스타성 겨루기로 유명했는데 <양귀비>에서 김지미의 목욕신을 홍보하며 이목을 끌자 <천하일색 양귀비> 역시 도금봉의 목욕신을 찍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결국 둘 다 흥행에 실패해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 소설 《음양사》 시리즈로 유명한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 《사문공해 당나라에서 귀신과 연회하다》 1~4(沙門空海唐の国にて鬼と宴す)를 원작으로 하여 <패왕별희>의 첸카이커 감독이 제작한 중일합작 영화 <[[요묘전: 레전드 오브 더 데몬 캣]]>에서는 장용용이 분했으며,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절세미녀이자 [[경국지색]]으로 당연히 나온다. 영화속 당명황 [[이융기]]의 성당시대의 또다른 주인공으로 나오며,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차마 황제를 죽일 수는 없었기에, 나라를 망친 양귀비의 6촌 당형이자 [[사공]]이고, 황실과 같이 피난 행렬에 있었던 [[양국충]]과 일족들을 모두 죽이고 양귀비도 죽이려고 하자 현종이 도술가 황학에게 부탁을 하여 수면상태로 만들고 전란이 끝나기를 기다리게 되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49년 뒤의 장안성을 뒤흔들게 되는 사건들의 원인이 되는 인물로 나온다. * [[Fate/Grand Order]]에서 [[포리너]] 클래스의 [[서번트(Fate 시리즈)|서번트]]로 데뷔했다. [[양귀비(Fate 시리즈)|해당 문서]] 참고. * 2007년 드라마 <대당부용원>에서는 배우 [[판빙빙]]이 연기했다. 여기서의 양귀비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활발하며 [[현종(당)|당현종]]과는 서로의 예술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지음의 관계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 2010년 드라마 <양귀비비사>에서는 배우 은도가 연기했다. 배우가 [[OST]]를 직접 부르는 등 영상화될 때마다 진정한 양귀비 재현에 힘쓴 모습을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a786eae707c90172b6184c55a1f85068.jpg]] * 2015년 개봉한 영화 <[[양귀비: 왕조의 여인]]>에서는 배우 [[판빙빙]]이 연기했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융성했던 당나라가 한 여인에 의해 파멸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담았다. * 2015년 게임 [[왕자영요]]에 법사 영웅으로 등장한다. 폭딜이 불가능하지만 광역힐이 가능하다. [[파일:귀비14.jpg|width=350]] * <[[삼국지 14]]>에서는 본명 양옥환으로 나오며, 전기제패 모드 [[관도대전]] 클리어 보상으로 해금된다. 능력치는 통솔 2/무력 3/지력 59/정치 1/매력 97이다.[* [[초선]]이 본작에서 매력 95로 하향되어 전 여성 무장 중 매력 1위다.] 장점개성으로 경국, 악주, 문화. 단점개성으로 낭비, 나약. 전법은 경국지무 1개만 보유하고 있고 진형도 학익 1개다. 주의는 명리, 정책은 본초학 Lv 6에 친애무장으로 초선, 장비. 혐오무장은 없다. 상성은 [[동탁]]군의 1로 설정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