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ffd400 '''안평대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4대 명필)] ---- [include(틀:조선의 역대 집권세력)]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세종의 왕자[br]{{{+1 안평대군 | 安平大君}}}'''}}}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소원화개첩.jpg|width=100%]]}}} || ||<-2> {{{#ffd400 {{{-2 [[소원화개첩|{{{#FFD400 소원화개첩}}}]]}}} }}} || ||<|2> '''출생''' ||[[1418년]] [[10월 27일]] || ||[[조선]] [[한성부]] [[경복궁]][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서울)|사직로]] 161) || ||<|2> '''사망''' ||[[1453년]] [[11월 27일]] (향년 35세) || ||[[조선]] [[경기도]] [[교동도|교동군]][br](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 || '''묘소''' ||미상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용(瑢) || || '''부모''' ||부왕 [[세종(조선)|세종]][br]모친 [[소헌왕후]] || || '''형제자매''' ||18남 4녀 중 3남 || || '''배우자''' ||부부인 [[연일 정씨]] (府夫人 迎日 鄭氏) || || '''자녀''' ||'''슬하 2남''' 장남 - 의춘군 이우직(宜春君 李友直) 차남 - 덕양군 이우량(德陽君 李友諒) || || '''종교''' ||[[유교]] {{{-2 ([[성리학]])}}} || || '''자''' ||청지(淸之) || || '''호''' ||비해당(匪懈堂)[* 원래 안평대군의 봉호가 안평(安平)이라 게을러질 것을 염려한 세종대왕이 게으름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비해당이라고 호를 내려주었다고 한다.][br]낭간거사(琅玕居士)[br]매죽헌(梅竹軒)[* 사육신중 하나인 성삼문의 호와도 같다] || || '''군호''' ||'''안평대군(安平大君)'''[* 봉호는 [[충청남도]] [[홍성군]]의 옛 지명인 안평(安平)에서 유래했다. 홍주 이씨 일부에서 안평 이씨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홍성군에서 유래한 것이다.] || || '''시호''' ||장소공(章昭公)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예술가]]. [[세종(조선)|세종]]과 [[소헌왕후|소헌왕후 심씨]]의 셋째아들이며 [[문종(조선)|문종]]과 [[세조(조선)|세조]]의 친동생.[*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의 친형이고 [[단종(조선)|단종]], [[의경세자|덕종]], [[예종(조선)|예종]]의 숙부이다.] == 생애 == 서예, 시문, 그림에 뛰어나 '삼절'이라고 불렸다. 특히 [[중국]]의 고서화를 수집했는데 [[조맹부]]와 소식([[소동파]]) 등 중국의 유명한 문인들의 서예들을 수집해서 보고 많이 연마했는지 [[중국]]에서도 사라진 조맹부체를 가장 잘 구사하는 명필로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탄했을 정도였다.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안평대군에게 달려가서 글을 써달라고 간청했을 정도.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히는 등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탕하고 인간적인 면모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랐다고 한다. 왕의 아들이라 권력의 핵심에 가까웠던 점도 한몫했겠지만, 안평대군이 예술에 뛰어난 기질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내가 불사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지극히 부지런하였으나, [[세종(조선)|세종대왕]]과 [[소헌왕후]]와 [[문종(조선)|문종]](文宗) 대행왕이 서로 잇달아 [[붕어]](崩御)하시고, 아들 우량도 또 따라서 죽고, 이제 또 아내도 죽으니 비로소 불사가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 정씨와 사이가 나빴는데 단종 즉위년(1452) 음력 12월 19일에 아들 이우량(友諒)이 병사하였고, 단종 1년(1453) 음력 4월 23일에 아내가 죽자 안평대군은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하였다.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한 것이라 [[욕]]을 꽤나 먹었다. 이후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덕을 드리기를 멈추었다. [[단종(조선)|단종]]이 즉위한 후 종친과 문사를 바탕으로 힘 있는 종친으로서 [[세조(조선)|수양대군]], [[황보인]], [[김종서(조선)|김종서]] 등 고명대신들과 3각 구도를 이뤄서 한가락을 하였다. 김종서가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안평대군을 끌어들이면서 다수파의 한 축으로서 사실상 형보다 앞서 나갔다. 하지만 [[계유정난]]에서 이복동생 [[계양군]] 이증의 무고로 인하여 형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일 때 [[강화도]]로 [[귀양]]을 갔으며 그 후 [[교동도]]로 이배되고 36세에 [[사약]]을 받았다. 계유정난의 명분이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모반을 꾀한 걸 미리 때려잡았다는 것이지만 안평대군이 그랬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이다. 왜냐하면 다수파였던 김종서, 황보인 세력과 합작한 것이 결국 숙이고 들어간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결국 무난하게 잘 나가는 [[종친]]의 위치가 바뀌기 어렵다. 왕이 되면 오히려 [[신하]]들이 옹립한 휘둘리는 왕이 되니 더 괴로워질 것이다. 김종서, 황보인 등 신하들도 안평대군을 옹립할 이유가 없는 게 자신들의 권력은 일단 문종이 어린 단종을 지켜달라며 고명대신으로 임명했기에 나오는 권력이다. 즉 단종이 왕위에 있고 자신들이 단종을 옆에서 지켜줘야 권력과 권위가 유지되는 공생관계인데 굳이 단종을 폐위시키는 명분도 없는 역모를 저지를 이유가 없다. 그리고 어린 단종과 다르게 안평대군은 성인이라 친정을 할 수 있으므로 신하들에게 좋을 게 없다. 안평대군이 세종의 동복 막냇동생이자 숙부인 성녕대군에게 출계가 되었다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근거가 동생인 임영대군보다 없다. 결국 형의 앞길에 방해가 되어서 제거된 것이었다. 한편 [[성녕대군]]의 부인 양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창녕 성씨|성씨]]는 훗날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이 유배 및 사사되자 이에 연루되어 폐출되고 [[경주시|경주]]로 귀양가게 되었다. 몇 년 뒤 귀양에서는 풀려났으나 본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가 죽었다. 그 후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녕대군|남편]]과 같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영조]] 23년(1747) 때야 복호되어 '장소(章昭)'라는 [[시호]]를 받았다. == 가족 관계 == * 생부 : [[세종(조선)|세종]](世宗, 1397 ~ 1450) * 생모 : [[소헌왕후]] [[청송 심씨|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 ~ 1446) - 청천부원군 [[심온]](靑川府院君 沈溫)의 딸 * 친누나 :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 ~ 1424) * 친형 : [[문종(조선)|문종]](文宗, 1414 ~ 1452) * 친조카 : [[단종(조선)|단종]](端宗, 1441 ~ 1457) * 친누나 :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 ~ 1477) * 친형 : [[세조(조선)|세조]](世祖, 1417 ~ 1468) * 친조카 : 추존왕 [[덕종(조선)|덕종]](德宗, 1438 ~ 1457) * 친조카 : [[예종(조선)|예종]](睿宗, 1450 ~ 1469) * 친동생 : [[임영대군]](臨瀛大君, 1420 ~ 1469) * 친동생 :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 ~ 1444) * 친동생 :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 ~ 1457) * 친동생 : [[평원대군]](平原大君, 1427 ~ 1445) * 친동생 :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 ~ 1467) * 양부/숙부 :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 ~ 1418) * 양모/숙모 : 삼한국대부인 [[창녕 성씨|성씨]](三韓國大夫人 成氏) - 성억(成抑)의 딸 * 양동생 : 원천군(原川君) - 숙부 [[효령대군]]의 6남 * 정부인 : 부부인 [[연일 정씨]](府夫人 迎日 鄭氏, ? ~ 1453) - 좌의정 정연(鄭淵)의 딸 * 장남 : 의춘군 이우직(宜春君 李友直, 1439 ~ 1454) * 며느리 : 군부인 [[의령 남씨]](郡夫人 宜寧 南氏) - 좌의정 [[남지]](南智)의 딸, 동생 [[임영대군]]의 부인과 자매, 영의정 [[남재]](南在)의 증손녀 * 양자 : 이억수(李億秀) * 손녀 : 김계성(金季誠)의 처 * 차남 : 덕양군 이우량(德陽君 李友諒, ? ~ 1452) * 며느리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기타 == * 똑같이 [[세조(조선)|친형]]의 [[계유정난|정변]]에 반기를 든 [[금성대군]]은 그 [[후손]]이 현재에도 남아 [[금성대군]]파를 형성했다.[* [[세조(조선)|세조]]가 [[금성대군]]의 아들들은 죽이지 않고 [[관노]]로 삼아서 어찌어찌 대를 잇는데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손녀 한명을 제외하고는 아들들도 주멸되는 탓에 후사가 완전히 끊어져 직계 후손이 공식적으로는 없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조선)|중종]] 13년(1518) 6월 7일 2번째 기사.] 이후 선원속보 안평대군파보에 의하면 [[영조]]의 명으로 금성대군파의 이억수(李億秀)가 안평대군의 장남 의춘군의 [[http://visualjoseon.aks.ac.kr/viewer/view?itemId=jb&gubun=pa&dataId=K21116_001%5E%EC%95%88%ED%8F%89%EB%8C%80%EA%B5%B0%ED%8C%8C%5E%EC%95%88%ED%8F%89%EB%8C%80%EA%B5%B0%ED%8C%8C|후사를 잇게 되었다.]] 안평대군이 죽고 약 200여 년이나 지난 후였다. * 양아버지 [[성녕대군]]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왕일때 궐에서 태어났다. 그 이하 동생들도 궐에서 태어났다. * [[국립중앙도서관]]에 비치된 안평대군파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에도 소장 중이다.]를 보면 안평대군의 맏아들인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에게 이운생(李雲生)[*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구글링]]으로도 나타나지 않는다.]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나오는데 계유정난 때문에 [[평안도]] [[태천군|태천]]으로 은거했다고 한다. [[숙종(조선)|숙종]] 이후에 사후 복권이 이루어졌지만 1930년대까지 약 230년 간 안평대군의 자손임을 숨기고 살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전주이씨대동종약원 홈페이지에 안평대군에 대한 정보는 없다.[* 다만, 안평대군의 이복동생으로 역시 계유정난으로 희생된 [[영풍군(조선)|영풍군]]에 대한 정보는 있다.] * 생전에 시문서화에 능통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여러 작품을 남겼을 듯하지만 [[역사]]의 패배자인 탓인지 안평대군이 수집한 고서화나 그의 [[서예]] 작품은 남아있는게 거의 없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비문이나 글씨 교본,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소원화개첩뿐이다. 그와 친밀한 사이였다가 돌아서버린[* [[신숙주]]는 물론이고 [[사육신]]들까지 포함해서 [[집현전]] 소장 학자들은 [[김종서(조선)|김종서]], [[황보인]] 등 노대신들이 고명대신으로서 정사를 좌우하는 것에 크게 불만을 품었다. 그 때문에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계유정난은 집현전으로 대표되는 소장 학자들과 수양대군으로 대표되는 포섭되지 않은 종친 세력이 서로 손을 잡고 [[김종서(조선)|김종서]] 세력을 쳐버린 것이라는 평이 많다.] [[신숙주]]가 자신의 문집에 안평대군이 수집했던 고서화의 목록을 남긴 덕에 어떤 작품들을 모았는지는 알 수 있기는 하다. 안평대군의 작품으로 몽유도원도 발문 등이 유명한데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꾼 [[꿈]]을 [[안견]]에게 이야기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안견]]은 유일하게 안평대군이 총애한 조선 [[화가]]여서 안평대군은 자신이 소장한 [[중국]] 전통화단 대가들의 [[그림]]을 안견에게 보여주며 익힐 수 있도록 도와줬다. [[안견]]은 보신을 위해 안평대군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안평대군이 아끼던 용매묵이라는 비싼 먹을 훔치려다 들켜서 눈 밖에 나고 "대군을 볼 낯이 없다"며 더이상 찾아가지 않았다. 이후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안평대군과 친했던 사람들은 봉변을 당했는데 [[안견]]은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사실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는 그 시대라서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왕자]]가 공무를 맡아보고 젊은 학사들과 시회를 열던 [[세종(조선)|세종]] 후반기 [[정치]]적 경향을 보여준다. 안평대군은 왕자 신분과 자신의 역량으로 집현전부터 당상관까지 어우를 수 있는 당대의 문화적 [[아이콘]]이었고 바꿔 말하면 언제든 [[정치]]적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몽유도원도는 문화사나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거기 실린 이름들의 면면을 보면 엄청난 정치적 [[인맥]]을 발견할 수 있다.[* 형인 [[수양대군]]은 이런 인맥을 쌓기보다는 [[권람]], [[한명회]] 같은 인물들이나 [[무뢰배]]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인다. [[세종(조선)|세종]]은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이나 비슷하게 일을 시켰고 형이어서인지 [[수양대군]] 쪽을 더 시키기까지 했는데도 인맥을 쌓지 못한 것.] 이런 안평대군을 [[수양대군]]이 [[질투]]하고 두려워해 제거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몽유도원도의 발문은 [[일본]] 덴리대학에 전시 중이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위치한 [[제주 관덕정]]에는 안평대군이 썼던 현판이 걸렸으나 불에 타 사라지고 이후 [[선조(조선)|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쓴 현판이 남아 전한다. * 안평대군의 글씨 중 현재까지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본으로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238호로 지정된 [[소원화개첩]]이 있었으나 2001년 소장자가 [[도난]]당하였다. 이후 [[경찰]]이 수사했지만 [[범인]]은 물론 소원화개첩의 행방도 묘연했다. 결국 2010년 소원화개첩을 [[인터폴]]에 국제 수배하는 선에서 장기 미제 사건으로 마무리했으니 안평대군이 주목을 받을 날은 요원한 듯. == 대중매체 == 2차 창작물 중 어찌된 일인지 안평대군을 긍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은 별로 없다. 얼핏 보면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우선 사육신을 띄워주는 방향으로 연출하게 되면 문종 재위기에 작은형 수양대군과 마찬가지로 종친으로서 권력을 탐한 모습을 커버쳐줄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김종서와 손잡은 것만 가지고 개과천선이라고 하면 너무 막 나가는 셈이고... 반대로 세조를 우호적으로 그린 작품이라면 아주 높은 확률로 권력욕에 가득찬 악당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 고전소설 [[운영전]]에서도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배경이 되는 수성궁의 주인이다. 운영을 비롯하여 자신이 데리고 있는 [[궁녀]]들에게 시문이나 각종 재주들을 가르치는 긍정적 면모[* 평등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로 나온다.]를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운영과 김진사의 [[연애]]를 금지하여 결과적으로 둘 모두를 죽게 만드는 부정적 모습[* 다만 사실 궁녀들과 외간 남자와의 연애는 원래부터 금지된 사항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냥 [[궁궐]] 내규를 깐깐히 적용하는 주인 정도라고 볼 수도 있다.]도 보여주는 멋들어지고 세련되게 묘사되나 덕은 부족한 주군이라는 입체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나마 예술가적 기질이 있던 안평대군을 어느 정도 묘사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극들의 취급보다 나을 수는 있겠다. 소설에서 그려지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세상 모든 귀하고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온갖 명사들과 자유롭게 벗하는 왕자의 [[이미지]]는 정말 안평대군이 아니라면 소화가 어려운 이미지이기는 하다. *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배우 [[차두옥]][* 현재는 [[동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이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 배우 [[노영국]]이 연기했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정성모]]가 연기했다. 수양대군 미화와 별개로 수양대군과 적대한 [[김종서(조선)|김종서]], [[혜빈 양씨]], [[금성대군]]은 마냥 [[악당]]으로 비하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나오나, 유독 안평대군만 야심찬 [[악역]]으로 그려진다. [[http://blog.naver.com/dahoje8777/130048837879|세종의 왕자들 배역]].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도 나오기는 하나, 세종의 죽음조차 그려지지 않은 채로 끝나버렸으므로 비중 적은 조연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 2009년 영화 [[인사동 스캔들]]에서는 박영석이 맡아 연기했다. 사실 이 작품은 [[안견]]의 가상의 그림인 벽안도를 둘러싼 현대 인물들의 이야기라서 안평대군의 비중은 많지 않다. [[몽유도원도]]를 받고 "내 꿈을 이렇게 잘 그려줬으니, 이젠 자네 꿈도 보고 싶구나."라고 말하는 게 전부이며, 얼굴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 2011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가 취급이 그나마 좋게 나온 것이기는 한데, 배우 [[이주석(배우)|이주석]]의 분위기와 비중이 하나같이 상당히 약하며, 오히려 둘째동생 금성대군의 [[포스]]가 더 크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드라마)|인수대비]]에서는 배우 [[이광기]][* 공교롭게도 이광기는 같은 [[작가]]의 예전 작품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안평대군의 조카 [[의경세자]] 역을 맡았다. 또한 안평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을 연기한 배우가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후백제]]의 왕좌를 두고 대립하던 이복동생 [[견금강]]을 연기한 [[전현]]이라 후백제의 왕자 [[견신검]]과 금강이 조선의 왕자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으로 [[환생]]했다는 [[배우 개그]]가 성립한다.]가 연기했다. 참고로 책사 이현로는 [[김규철(배우)|김규철]]이 맡았다. * 2013년 개봉한 영화 [[관상(영화)|관상]]에서는 배우 신기원이 연기했다. 문종이 꼽아놓은 역모를 일으킬만한 요주의 인물 블랙리스트 안에 있었으나, 왕가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섬세한 감수성과 심미안을 지녀 감히 살생은 못할 인물이라 평가받았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다가도 안평대군의 관상을 평한 김내경의 말을 듣고 "벌레를 봐도 죽이지 않고 그걸 그리고 있는 녀석"이라고 동생 생각에 잠기는 큰형 [[문종(조선)|문종]]의 흐뭇한 표정도 인상적. * 어린이 과학동아에 연재된 만화 [[조선 과학 삼총사]]에서는 5살 꼬마로 등장한다. 어린 나이지만 서화에 관심이 많아 부왕을 졸라서 [[명나라]]행을 허락받았다. * [[해를 품은 달]]과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작가 정은궐 씨의 소설 [[홍천기]]에서는 제법 비중 있게 나온다. 위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2021년 [[SBS]] 드라마 [[홍천기(드라마)|홍천기]]에서는 작중 배경이 조선이 아닌 가상의 국가인 단왕조로 바뀜에 따라 '양명대군'으로 나온다. 배우는 [[공명(배우)|공명]]. == 둘러보기 == [include(틀:장릉배식록 수록자)] ---- [include(틀:진승총(기타 사서 포함))] [각주][include(틀:표절, version=180~181, source=한국고전종합DB)] [[분류:안평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