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총대주교좌)] [목차] == 개요 == > [[안타키아|안티오키아]]에 있는 신도들이 처음으로 [[기독교인|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 [[사도행전]] 11장 26절 사도행전에도 언급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시작된 유구한 [[교회]]로, [[니케아 공의회]] 체제에서 [[로마 교황|로마]],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삼두 체제를 이루었다. 또한 [[성서주석학]]적으로 보자면 [[마태오 복음서]]의 저술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교회별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정교회)|정교회 총대주교]]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정교회)|시리아 정교회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마론파)|마론파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멜키트 그리스 가톨릭)|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가톨릭)|시리아 가톨릭 총대주교]]로 총 '''5명'''이 존재한다. [[로마 총대주교|로마]]는 1명([[교황]]),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는 2명,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총대주교|예루살렘]]은 각각 3명인 것을 생각하면 좀 비범하다 생각될 정도로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 중 세 명이 [[동방 가톨릭 교회]] 소속이다. 세 동방 가톨릭 교회들은 [[교황수위권]]을 따르는 [[가톨릭|같은 교회]]이지만, 분열되어 나온 시점도, 경위도, 교회 조직도, 무엇보다도 [[전례]] 양식이 완전히 별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5> [[파일:Five_Patriarchs_of_Antioch.jpg|width=100%]] || ||<-5> 2017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5명의 사진. 왼쪽부터… ||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멜키트 그리스 가톨릭)|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정교회)|시리아 정교회]]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정교회)|정교회]]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마론파)|마론파]]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가톨릭)|시리아 가톨릭]] || || 그레고리오 3세 리함[* 이 사진을 찍고 나서 같은 해 5월 6일에 퇴위하였다.] || 이그나티우스 아프렘 2세 || [[유한나 10세]] || 베차라 부트로스 알 라히 || 이냐시오 요셉 3세 || 이 5명 중 현재 [[안티오키아]]([[안타키아]])에 사는 사람은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단 한 명도 없다]].(...) 안타키아 자체가 인구 수 20만의 황량한 소도시로 몰락한 만큼 당연한 것일지도. 3명은 [[시리아]] [[다마스쿠스]], 2명은 [[레바논]] [[베이루트]] 또는 그 근교에 있다. [[교부]] [[오리게네스]]의 기록에 의하면 안티오키아의 초대 총대주교는 [[12사도|사도]] [[베드로]]라 하며, 아래의 다섯 교파가 모두 이 기록을 따라 사도 베드로를 기원으로 두고 있다. 베드로가 안티오키아로 떠나 [[로마]]로 가면서 주교직은 에보디오스가 계승했는데, [[로마 제국]]의 박해 시기에 [[순교]]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그나띠오스 역시 순교하였다. == 공통 역사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Syriac_Christian_Churches.svg.png|width=100%]] || ||<-4> 시리아 기독교의 역사 || ||<|2>||<|2> 비잔티움 전례 ||||Melkite Greek Catholic Church: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 ||||Greek Orthodox Church of Antioch: [[정교회]] || ||<|6>||<|3> 서시리아 전례 ||||Maronite Church: [[마론파]] || ||||Syriac Orthodox Church: [[시리아 정교회]] || ||||Syriac Catholic Church: [[시리아 가톨릭]] || ||<|3> 동시리아 전례 ||||Ancient Church of the East: [[동방 고대교회]] || ||||Assyrian Church of the East: [[아시리아 동방교회]] || ||||Chaldean Catholic Church: [[칼데아 가톨릭]] || ||<-4>{{{-3 ※ 오류 정정: [[1724년]] 이전의 비잔티움 예법 교회는 [[로마 교황|로마]]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양측과 모두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티오키아 그리스 정교회에서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이 분리된 것이 아니다.}}}||}}}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의 탄압을 피해 [[안타키아|안티오키아]]로 대거 유입된 것이 안티오키아 교회이며, 한동안은 도시 자체의 성장세를 타고 순항하였다. 그러나 [[4세기]] 초 [[아리우스파]]가 등장하면서 슬슬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아리우스]]의 주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이 바로 안티오키아였기 때문. 아리우스의 주장을 추종하는 [[주교]]들도 몇몇 나타나고 그 와중에 몇 명이 파문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서막에 불과했다. 360년 멜레티우스가 안티오키아 교회의 수장이 되었는데, 취임 설교 때 아리우스파에 반대되는 의견을 냈다가 추방당했다. 이에 아리우스파 및 아리우스를 [[이단/기독교|이단]]으로 규정한 [[니케아 신경]]을 따르는 [[아타나시우스파]], 그리고 중립파인 멜레티우스파와 또다른 반아리우스파인 아폴리나리우스파[* 아폴리나리우스는 [[라오디게아]]의 [[주교]]로서 [[니케아 공의회]] 당시 아리우스파에 맞섰으나, 자신 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시하는 엇나간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이렇게 네 개의 파벌로 나뉘어 각 파벌에서 따로따로 주교를 내는 등, 그야말로 전례없는 막장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후 [[칼케돈 공의회]]가 열리며 다시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가 극심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황제권을 동원하여 비칼케돈파를 교회에서 축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칼케돈파는 [[시리아 정교회]]라는 살림을 따로 차리게 된다. 이후 안티오키아가 온갖 전쟁과 사막화로 인해 이전의 위용을 잃자 결국 [[14세기]] 들어 [[다마스쿠스]]로 총대주교좌를 옮겼다. 의외의 사실은, [[18세기]]까지는 [[칼케돈파|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로마 교황|로마]] 및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각각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동서 대분열|상호 파문]]을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1724년]]에는 키릴로스 6세가 총대주교로 선출됐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쪽에서 키릴로스 6세의 친로마적 성향 때문에 선출을 불인정-[[파문]] 콤보를 때리고 친콘스탄티노폴리스 성향의 [[수도자]]를 총대주교로 서임하면서, 로마와 친교를 가진 키릴로스 6세를 지지하는 파벌은 [[가톨릭]]으로[* 통칭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시리아어]]로 '[[왕]]'을 뜻하는 malkoyo에서 유래한 말로, [[왕당파]]란 뜻. [[칼케돈파]] [[기독교인]]들에 대한 멸칭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일반용어가 됐다. 1724년의 분리 이후로는 가톨릭쪽에 대해서만 이 용어가 쓰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친교를 유지하는 쪽은 [[정교회]]로 합류했다. == 교회별 총대주교 ==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정교회)]]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정교회)]]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마론파)]]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시리아 가톨릭)]] [[분류:안티오키아 총대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