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ece5b6 '''{{{+1 당나라의 대신[br]낭야대자(琅邪戴子)[br]{{{+1 顔師古 | 안사고}}}}}}'''}}} || || '''{{{#fff 작호}}}''' ||<(> 낭야현자(琅邪縣子) || || '''{{{#fff 시호}}}''' ||<(> 대(戴) || || '''{{{#fff 성}}}''' ||<(> 안(顔) || || '''{{{#fff 이름}}}''' ||<(> 주(籀) || || '''{{{#fff 자}}}''' ||<(> 사고(師古) || || '''{{{#fff 부친}}}''' ||<(> 안사로(顔思魯) || || '''{{{#fff 조부}}}''' ||<(> 안지추(顔之推) || || '''{{{#fff 출생}}}''' ||<(> 581년 ~ 645년 || || '''{{{#fff 출신}}}''' ||<(>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수나라]], [[당나라]] 초기의 인물. 본명은 안주(顔籀)로, 자는 사고(師古)이다. == 생애 == 안사고는 581년에 안지추의 손자이자 안사로의 손자로 태어났다. 안사고는 어린 시절에 가업을 전수받아 다양한 책들을 섭렵하였고 문자의 해석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수나라 인수 연간에 상서좌승 이강(李綱)의 천거를 받아 안양현위(安養縣尉)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양소(수나라)|양소]]는 안사고의 나이가 어린 것을 보고 “무엇으로 다스릴 것인가?”라고 묻자, 안사고는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습니까?”라고 대답하여, 양소는 안사고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 뒤 안사고는 치적을 남겼다가 일에 연루되어 장안에서 머무르며 10년 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수나라 말에 [[고조(당)|이연]]이 진양에서 거병하자, 안사고는 장춘궁에서 이연을 알현하여 조산대부로 제수되었다. 618년 당나라가 건국된 뒤 안사고는 돈황공(敦煌公) 이세민의 문학사로 임명되고 기거사인으로 전임되었으며, 다시 중서사인으로 승진하여, 기밀을 전문으로 주관하였다. 안사고는 이 시기에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고 황제의 칙령을 담당하여 그를 따라올 인물이 없었다. 626년 현무문의 변 이후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하자, 안사고는 중서시랑으로 발탁되었으며 낭야현남(琅邪縣男)으로 책봉되었다. 안사고는 모친상을 당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중서시랑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일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안사고는 비서성에서 태종의 명으로 오경을 교정하는 일을 맡았다. 오경의 교정이 끝나자 태종은 유학자들을 불러들였는데, 유학자들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학설만을 전하며 안사고의 교정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했다. 안사고는 이에 [[남북조시대]]의 고전들을 인용하여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고 출처를 간결명료하게 인용하여 유학자들의 탄복을 받았다. 안사고는 통직랑(通直郞), 산기상시(散騎常侍)를 겸임하였고 안사고가 교정한 오경을 천하에 반포하였다. 633년에는 비서소감으로 임명되어 교정을 전담하였으며, 기이한 문자를 발견할 때는 그 근원을 분석하고 파악했다. 하지만 이때 안사고는 청빈한 선비가 아니라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는 이들을 우선하여 끌어들였고 그 중에는 상인들까지 끌어들여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에 직면하고 침주(郴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태종은 안사고가 침주 자사로 부임하기 전에 안사고의 재능을 아까워하여 다시 비서소감으로 등용하였다. 637년, 안사고는 태종의 명을 받들어 오례를 지어서 작위가 자로 올라갔고 [[한서]]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 이후 비서감(秘書監), 홍문관(弘文館) 학사로 승진하였고 645년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도중에 병으로 사망하여 대(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581년 출생]][[분류:645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