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1세기)] |||| {{{+3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br]{{{-1 [[라틴어]]: Appius Junius Silanus }}} || || '''생몰년도''' ||미상 ~ 서기 43년 || || '''출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 '''사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 || '''지위''' ||[[파트리키]] || || '''국가''' ||[[로마 제국]] || || '''가족''' ||소(小) 도미티아 레피다(아내)[br]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아들) || || '''직업''' ||[[로마 제국]] 원로원 의원 ||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서기 28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인 서기 28년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다. 의붓딸 [[메살리나]]가 불륜을 맺자고 요청한 일을 단호하게 거부한 일로, 메살리나에게 찍혔다. 메살리나와 그녀에게 속은 나르키수스에게 골수 원로원 중심 공화주의자로 모함받아,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1세]]를 암살할 생각으로 단검을 품고 있다는 누명을 쓰고 처형됐다. == 생애 == 고대 기록 중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로도 기록된 인물로, 전체 이름은 가이우스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이다. 이름 중 아피우스에서 드러나듯이, [[클라우디우스]] 일족 중 가장 위세 높은 풀케르 가문의 피를 이었다. 다만,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아들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15년 집정관)|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동생이라는 주장도 있고, 형제로 알려진 서기 15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또는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어, 정확한 가계는 모른다. 서기 25년 수도 로마에 상주한 법무관을 지냈고, 28년에는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다. 일찍부터 잘생기고, 교양이 풍부하고, 정직한 성격이라서 훌륭한 외모와 인품을 가진 로마귀족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차분하고 솔직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모두에게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세야누스가 몰락한 뒤인 서기 32년 그의 재산을 노린 델라토르들에게 반역죄로 고발받았다. 다행히 그를 고발한 델라토르 중 한 사람이 그가 누명을 썼다고 변호하며 무죄로 풀려났다. [[칼리굴라]] 황제 시절인 서기 40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가, 서기 41년 [[칼리굴라 암살 사건]]이 벌어지고 [[클라우디우스 1세]]가 즉위한 직후 갓 즉위한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으로 로마로 소환돼 [[메살리나]] 황후의 어머니인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결혼 후 황제의 후원자가 됐다. 그는 이때 갓 태어난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했고, 보호자 중 한명이 됐다. 미남인 까닭에 의붓딸 메살리나 황후에게 여러 번 추파를 받고 불륜을 제안받았다. 이때 메살리나는 의붓아버지 아피우스 실라누스에게 성관계를 맺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덕적이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아내 소 도미티아 레피다를 배신할 수 없다며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메살리나는 그에게 큰 원한을 품었다. 그래서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브리타니쿠스의 일이라면 무조건 충성을 맹세했던 해방노예 나르키수스에게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모함했다. 서기 42년, 황실 해방노예 나르키수스가 공황상태로 황제 침실로 달려와서 "꿈에서 아피우스 실라누스가 학살을 자행 중인 것을 봤다."고 고변했다. 그러자 황제 곁에 있던 메살리나 역시 자신도 꿈에서 같은 장면을 봤다며 아피우스 실라누스를 모함했다. 두 사람이 아피우스 실라누스를 모함한 시간은 공교롭게도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황궁에 보고를 위해 오기로 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메살리나, 나르키수스가 아피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공화주의자로 모함하고, 아피우스 실라누스가 황제를 살해하는 것을 본 꿈을 꿨다며, 옷 안에 단검을 숨겼다가 버렸다고 주장한 것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그대로 믿었고, 체포하라고 명했다. 이에 메살리나, 나르키수스는 황제의 명을 빌미로 사람을 보내, 아피우스 실라누스를 재판없이 살해했다. 그가 살해된 뒤, 메살리나와 나르키수스는 아피우스 실라누스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다가 현행범으로 살해됐다고 선포했다. 따라서 이 사건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매우 소심하고 비열하고 냉혹하다고 미움을 받게 된다. 두 번 결혼했는데,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로 가기 전 첫 아내가 일찍 죽어 사별했다가, 41년 두번째 아내 소 도미티아 레피다와 재혼했다. 첫 아내에게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를 뒀다. 아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54년 집정관을 지냈다. 그는 집정관일 당시, 10월 13일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죽음을 확인 후 이를 원로원에 보고하고, [[네로]]의 즉위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골항아리를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직접 매장한 일을 맡았던 사제로 의식을 맡았다. [[분류: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분류:로마 제국 집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