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아르샹보 드 푸아[br] Archambaud de Foix || ||<-2> '''생몰년도''' ||<(> 미상 ~ [[1419년]] [[9월 19일]] || ||<-2> '''출생지''' ||<(> 가스코뉴 공국 || ||<-2>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몽뜨흐 || ||<-2> '''아버지''' ||<(>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 || ||<-2> '''어머니''' ||<(> [[이자벨 드 푸아카스텔봉]] || ||<-2> '''형제자매''' ||<(> [[장 1세 드 푸아|장 1세]],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가스통 1세]], [[마티외 드 푸아코밍주|마티외]], 피에르 || ||<-2> '''직위''' ||<(> 나바유 남작 || [목차] [clearfix] == 개요 == 나바유 남작.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파에 가담했다가 [[용맹공 장]]과 함께 피살되었다. == 생애 == 아버지는 부흐의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로서 [[가스코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르샹보 드 그레일리]]였고, 어머니는 카스텔봉 자작인 로저베르나르 2세 드 푸아카스텔봉의 딸인 [[이자벨 드 푸아카스텔봉|이자벨]]이었다. 형제로 [[장 1세 드 푸아]],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 [[마티외 드 푸아코밍주|마티외]], 피에르[* 1386 ~ 1464, 아를의 대주교이자 추기경]가 있었다. 그는 베아른 자작령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인 나바유 남작에 선임되었다. 1407년부터 프랑스에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가 맞붙었을 때, 그는 다른 푸아 가문 구성원들과 함께 부르고뉴 파에 가담했다. 1409년 2월 12일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게 정식으로 고용되었고, 1410년 남동생 마티외와 함께 용맹공 장의 고문이자 시종으로 임명되었다. 1418년 9월, 용맹공 장과 [[샤를 7세|도팽 샤를]]의 화해에 목표로 하는 협상에 부르고뉴 측 대표로 참여했고, 이는 생모르 협약으로 마무리되었다. 9월 13일 [[샤를 1세 드 부르봉]], 필리프 드 생폴과 함께 양측 대표자들이 모인 샤랑통 회의에 참석했다. 1419년 9월 10일, 그는 용맹공 장이 지정한 10명의 영주 중 한 명으로서 몽뜨흐 다리에서 도팽 샤를과의 회담에 동행했다. 이후 아르마냑파 기사들이 용맹공 장을 기습 공격해 살해했을 때, 그는 급히 뛰어가서 [[기욤 2세 드 나르본]]이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머리에 도끼를 맞아 치명상을 입었고, 9월 19일에 몽뜨흐 성채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몽뜨흐의 노트르담 성당에 안장되었다. 1420년 부르고뉴파가 몽뜨흐를 탈환한 후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인 [[선량공 필리프]]는 6월 24일 밤에 용맹공 장과 아르샹보의 유해를 발굴해 1421년 7월 12일 샤르트뢰즈 드 샹몰 성당에 안장했다. [[분류:프랑스의 귀족]][[분류:백년전쟁/인물]][[분류:1419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