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81년/사건사고]] [[분류:제5공화국/사건사고]] [[분류:누명]][[분류:고문 사건]] [include(틀:사건사고)] [[파일:아람회 사건.jpg]][* 아람회 사건의 피해자였던 김난수 씨의 결혼식 사진] >막강한 국가권력을 뒷받침으로 한 경찰과 검찰은 우리의 눈과 입과 귀와 손발을 묶어 사회와 격리시켜 놓은 채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무죄]]지만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을 봉쇄당했습니다.''' >---- >사건 피해자 김창근이 쓴 상고이유서 中 [목차] [clearfix] == 개요 == 1981년 [[대전광역시]][* 당시에는 충청남도 대전시였다. 직할시 승격은 1989년.], [[충청남도]] 지역에서 발생한 [[종북몰이|용공조작]] 사건. == 전개 == === 반(反) 국가 단체가 된 친목 모임 === 이 사건과 연관된 사람들은 [[금산]] 지역에 살고 있던 평범한 시민으로서 1970년대부터 사회에 나름대로의 의식을 가지며 살고 있었다.[* 이들은 학교 교사, 군인, 경찰, 대학생, 검찰 직원, [[새마을금고]] 직원 등 다양한 계층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간의 만남과 이야기를 통해 만나게 되었고 친목을 위한 모임으로까지 발전했다. 이 모임의 사람들은 시국에 대한 토론을 하거나 수련회를 가며 시시때때로 만났다. 80년 5월 이후에는 [[5.18 민주화운동|5.18]]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그 진상과 관련된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자발적으로 조직된 [[진보]]적 [[시민단체]]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81년 6월 27일 친목 모임의 회원들은 충남 금산군 부리면 수통리로 수련회를 갔다. 이 수련회의 목적은 수련회의 회원들이 사정이 있어 모임을 잠깐 떠나게 되었기에 환송을 해주기 위함이었다. 수련회를 하다보니 주변 지역의 청년 및 학생들과 말이 트이게 되었고 자연스레 시국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오가는 말들을 수상쩍게 여겼던 한 고교생의 신고로 인해[* 이후 신고 당사자는 1999년 8월 28일자 [[KBS1]]《20세기 한국사: 해방》<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편 인터뷰에서 '''[[반공주의|반공]] 교육''' 때문에 신고를 하게 됐다며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82800289117005&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9-08-28&officeId=00028&pageNo=17&printNo=3593&publishType=00010|평생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https://youtu.be/IyoT0zd3x_A|참고 영상(31:26초부터)]]] 이 친목 모임은 [[공안]]당국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5.18의 진상에 관한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사실도 밝혀지면서 공안당국은 이 친목 모임을 반(反) 국가 단체로 조작하게 된다. === 터무니없는 혐의내용과 처벌 === 1981년 5월 17일 대전에서는 친목 모임의 회원이자 현직 육군 대위였던 김난수의 딸, '아람'의 [[백일잔치]]가 열렸었다. 여기서는 김난수의 친구들과 군인 선·후배 및 동기들, 이웃, 친척 등이 참석했는데, 공안당국은 여기서 피의자들이 소위 ''''아람회'[* 청소년 단체 [[아람단]]과 '''어떠한 관련이 없으니''' 주의할 것.]라고 불리는 반(反) 국가 단체를 결성했다는 혐의'''를 참가자들에게 뒤집어씌웠다. 이로 인해 7명[* 김난수, 정해숙, 황보윤식, 박해전, 김창근, 이재권, 김현칠]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아예 실체가 없던 일을 만들어낸 것이기에 잡혀간 관련자들은 한 달이 넘게 불법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다.''' 특히 이 사건의 주범으로 몰렸던 박해전은 대전 보문산 대공분실 지하실에서 여러가지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또 관련자 중 유일한 현역 군인이었던 김난수 또한 고문을 당하며 적지 않은 고생을 해야 했다. >[[숭실대학교|숭전대]]에 다니면서 용문중학교 간사로 있던 박해전 씨는 갑자기 7월 19일 [[흑석동(서울)|흑석동]]에 있는 집에서 학생들의 성적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수사관이 들이닥쳐 "황보윤식 씨에 대해 볼 것이 있으니 잠깐 같이 가자."고 해서 영문도 모르고 눈을 가리운 채 대전으로 끌려갔다. 이날부터 8월 20일 구속되기까지 '''물고문, 턱빼기, 발톱 짓밟기 등 온갖 정신, 육체적 고문을 당하면서 박 씨는 '아람회 사건'의 주모자로 조작됐다.''' (중략) 특히 현역 육군 대위로 이 사건에 연루됐던 김난수 씨는 [[전두환]] 씨를 광주학살 주범이라고 생각하고 불만을 토로한 것이 "나의 제일 목표는 진급이다. 그래서 전두환의 측근에 근무하면서 전두환 같은 [[독재자]]는 쏴 죽이겠다."는 말로 왜곡돼 [[보안대]]에 끌려가 이 '''거사'''에 사용할 총을 내놓으라는 요구와 함께 심한 고문을 당했다. >---- ><한겨레>, 1988년 9월 25일자 >피고인들을 강제 연행한 후 처음 약 1주일간은 24시간 내내 조명등을 켠 채 잠을 재우지 않았고, 책상에 앉아 잠시라도 졸면 핀으로 몸을 콕콕 찔러 잠을 못 자게 하였다. (중략) 손과 발에 수갑을 채우고 꽁꽁 묶은 다음 그 사이로 막대기를 끼우고, 마치 팔려가는 돼지처럼 양쪽 책상에 걸쳐 거꾸로 매달아 놓은 후 머리를 거꾸로 하여 얼굴에 수건을 덮고 코에 물을 부었다. (중략) 입주변의 양쪽 턱을 뽑듯이 손가락 2~3개로 세게 잡아 누르며 피고인들에게 자백을 강요하였다. >---- >서울고법 200 재노6 사건 판결문 이들이 반(反) 국가 단체를 결성해 [[북한]]을 이롭게 한 [[간첩]]으로 몰리면서 그동안 '''그들의 행동들도 전부 용공으로 몰렸다.''' 김난수 씨의 딸 [[백일잔치]]는 '''반(反) 국가 단체 결성식'''으로, 몇 개월 전 김난수 씨의 결혼식에서 관련자들이 민중교육청년협의회의 이름으로 [[펜던트]]를 나눠준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은 '''반(反) 국가 활동'''으로, 친목 모임 동안 간간이 오간 [[5.18 민주화운동|5.18]]에 대한 이야기는 '''[[유언비어]] 유포'''로 둔갑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과 [[김일성]]의 경력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는데 이것도 '''[[이적죄|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완전히 [[왜곡]]되고, [[조작]]된 혐의를 가지고 관련자들은 법정에 가게 되었다. 다행히도 고등재판에서는 "[[국가보안법]]에서 말하는 국가변란 목적은 적어도 정부전복 뒤 새로운 정부수립을 구체적으로 구상함을 요구한다."며 관련자들은 반(反) 국가 단체 구성과 [[국가보안법]] 부분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헌데 1982년에 열린 대법원에서는 2심에서의 판결을 완전히 뒤집고 "형식요건을 갖추지 않더라도 두 사람 이상이 임의적으로 공동 목적을 갖고 계속해서 결합했다면 반(反) 국가 단체 구성으로 보아야 한다."며 관련자들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 사건 이후 === 이 일로 사건 관련자들은 최대 10년 형까지 받아 형을 살다가 1983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반(反) 국가 사범 딱지를 가지고 살며 관련자들은 심한 고통을 받아야했다. [[고문]]에 의한 고통도 상당하여 관련자 중의 한 명인 이재권은 1998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재권 씨의 시신은 현재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관련자들은 2000년 재심을 청구했고, 9년 후인 2009년 서울고등법원에서 무죄 및 면소 판결을 받음으로써 '''28년만에 그 명예가 회복되었다.''' [[http://www.gg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30987|#]] 이 사건에서 피해자들의 영장심사를 맡은 [[이상수(정치인)|이상수]] 판사는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일종의 항명을 저지른 후 법복을 벗고 노동, 인권변호사가 된다. 이후 3선 국회의원 및 [[고용노동부|노동부]] 장관을 역임한다. 한편 유죄를 선고한 1심의 배석판사 중에서도 이후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이인제]]이다. 2007년 대선에 출마한 이인제 후보는 이 때 유죄판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뒤늦게 사과하였다. == 참고 자료 ==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2500289105001&editNo=2&publishDate=1988-09-25&officeId=00028&pageNo=5&printNo=115&publishType=00010&from=news#|<한겨레> 한국의 정치사건 80년대편 - 아람회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