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 추존 왕비)] ---- ||<#bf14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신의왕후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대한제국 추존 황후)] ---- [include(틀:역대 조선 왕대비)]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조선 태조의 정비[br]{{{+1 신의왕후 | 神懿王后}}}'''}}} || ||<-2><#e3ba6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color: #B22222" '''대한제국 태조의 정후[br]{{{+1 신의고황후 | 神懿高皇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제릉.jpg|width=100%]]}}} || ||<-2> {{{-2 제릉 전경}}} || ||<|2> '''출생''' ||[[1337년]] [[10월 6일]]^^([[음력]] [[9월 4일]])^^ || ||[[원나라|원]] [[쌍성총관부]] [[금야군|화령부]][br](現 [[함경남도]] [[금야군]]) || ||<|2> '''사망''' ||[[1391년]] [[11월 25일]]^^([[음력]] [[9월 23일]])^^[br]{{{-1 (향년 55세)}}} || ||[[고려]] [[동계]] [[함흥부]] [[함흥본궁|귀주동 이성계 사저]][br](現 [[함경남도]] [[함흥시]] [[함흥본궁]]) || || '''능묘''' ||[[제릉]](齊陵)[*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이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2009년]] 6월, 남편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무덤이 있는 [[동구릉]]을 포함하여 [[대한민국|남한]] 내의 모든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만, 제릉은 [[북한]]에 있어 아들 [[정종(조선)|정종]]부부가 있는 후릉과 더불어 아쉽게도 등재가 안되었다. 그래서 기신일(돌아가신 날을 기리고 제사지내는 일)이 되면 남편이 있는 동구릉 내 [[건원릉]]의 정자각에서 제향한다. [[https://blog.naver.com/ohyh45/20195976884|링크]]] || ||<|2> '''재위기간''' ||'''{{{#3F6864 고려 원신택주}}}''' || ||[[1364년]] [[2월]] ~ [[1391년]] [[11월 2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청주 한씨]][*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5세.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본관을 '''안변(安邊)'''으로 하고 있었다. 족보에 따르면 예빈윤공(禮賓尹公) 한연(韓連) — 안원군(安原君) 한유(韓裕) —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정승 한규인(韓珪仁) — 5남 안천부원군 한경(韓卿) — 장녀 신의왕후로 가계가 이어진다.] || || '''부모''' ||부친 - 안천부원군 한경 (安川府院君 韓卿) 모친 - 삼한국대부인 [[신(성씨)#삭녕 신씨|삭녕 신씨]] (三韓國大夫人 朔寧 申氏) || || '''형제자매''' ||5남 2녀 중 장녀 || || '''배우자''' ||[[태조(조선)|태조 고황제]] || || '''자녀''' ||{{{#!folding 슬하 6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진안대군]](鎭安大君, {{{-3 1354 ~ 1393}}}) 차남 - '''[[정종(조선)|정종]]'''(定宗, {{{-3 1357 ~ 1419}}})[* 봉호는 영안군(永安君).] 3남 - [[익안대군]](益安大君, {{{-3 1360 ~ 1404}}}) 4남 - [[회안대군]](懷安大君, {{{-3 1364 ~ 1421}}}) 5남 - '''[[태종]]'''(太宗, {{{-3 1367 ~ 1422}}})[* 봉호는 정안군(靖安君).] 6남 - [[덕안대군]](德安大君) 장녀 - [[경신공주]](慶愼公主, {{{-3 ? ~ 1426}}}) 차녀 - [[경선공주]](慶善公主)}}} || || '''종교''' ||[[불교]] || || '''봉작''' ||원신택주(元信宅主) → 절비(節妃)[br]→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 || || '''전호''' ||문소전(文昭殿) || || '''휘호''' ||승인순성(承仁順聖) || || '''시호''' ||'''[[조선]]''': '''신의왕후(神懿王后)''' ---- '''[[대한제국]]''':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 || [목차] [clearfix] == 개요 ==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조강지처이자 정비. [[진안대군]] 이방우, 제2대 [[정종(조선)|정종]] 이방과, [[익안대군]] 이방의, [[회안대군]] 이방간, 제3대 [[태종(조선)|태종]] 이방원, [[덕안대군]] 이방연, [[경신공주]], [[경선공주]]의 어머니다. 배우자인 [[태조(조선)|태조]]와 더불어 [[조선/왕사|조선 왕조]]의 건국시조이며, 혈통상으로 [[정종(조선)|정종]]부터 [[순종(대한제국)|순종]]까지 26명의 왕은 물론, 오늘날 [[전주 이씨]] 대다수가 신의왕후의 직계후손이다. == 생애 ==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과 삼한국대부인 신씨(三韓國大夫人 申氏)의 딸로, [[영흥]]에서 태어났는데 이성계와는 같은 고을 출신이다. 15살 때, [[동북면]]의 가장 큰 실력자 중 하나였던 [[이자춘]]의 아들 [[태조(조선)|이성계]]와 혼례를 올려 6남 2녀를 낳았다. 남편이 전쟁터를 휩쓸고 누비는 동안 가정의 대소사를 챙기며 [[영흥]] 땅에서 거주하였다. 그 와중에 [[태조(조선)|이성계]]는 [[고려]]의 수도 [[개성시|개경]]에서 고위 귀족 집안인 [[신덕왕후|곡산 강씨의 영애]]와 20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정략결혼]]을 한다. 이는 당시 고려 시대 기준으로도 불법적인 [[중혼]]이었다.[* 다만 당시 고려 시대에서는 높으신 분들이 향처와 경처를 나눠 중혼을 하는 [[일부다처제]]인 경우가 왕왕 있었다. [[태조(조선)|이성계]]도 [[개성시|개경]]의 정계로 진출하면서 중혼을 하는데 이후 [[신의왕후|한씨]]는 향처가, [[신덕왕후|강씨]]는 경처가 된다.] [[위화도 회군]] 때에는 본거지인 [[동북면]]에 피신해 있다가 [[1391년]](공양왕 3년), 그것도 '''조선 건국 10개월 전에''' 5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경처인 [[신덕왕후|강씨]]가 손쉽게 [[조선]] 개국 이후 처음으로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절비(節妃)에 추존되었고 다섯째 아들인 [[태종(조선)|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내세워 결국, 둘째 아들인 이방과가 [[조선/왕사|왕위]]에 올라 [[정종(조선)|정종]]이 되자 '''신의왕후(神懿王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후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태종(조선)|태종]]이 된 후 더 높여져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추존되었다. 그 뒤 [[숙종(조선)|숙종]] 9년인 [[1683년]]에 태후라는 존호가 제후국인 [[조선]]에는 맞지 않다고 하여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로 다시 개책하였다.[* 태종 이후에 [[종묘]] 태조실에서 지아비인 태조는 '''태조 강헌__대왕__(太祖 康獻__大王__)'''인데, 부인인 한씨는 '''승인순성신의__왕태후__(承仁順聖神懿__王太后__)'''로 마누라가 더 높은위치에 있었고, [[현종(조선)|현종]] 시기 후궁으로 격하되어 있던 [[신덕왕후]]가 다시 복권되면서 [[태조(조선)|태조]]를 사이에 두고 두 왕비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한쪽이 더 격이 높은 비대칭적인 형태였다.] [[대한제국]] 때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건국시조 태조를 대한제국의 [[황제]]로 추존함에 따라 부인이던 신의왕후를 한단계 더 높게 하여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되었다.[* [[조선/왕사|왕실]]에서 [[대한제국/황실|황실]]로 격상했으니 전통에 따라 [[고종(대한제국)|고종]] 이전 4대조 임금(장조, 정조, 순조, 문조, 철종, 헌종)을 [[황제]]로 추존했는데, 거기에 더해 국조인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와 그 정실 왕후들을 추숭했기 때문. 따라서 [[종묘]]의 신위에도 대한제국 때에 이르러 신의고황후라고 적혀있다.] 신의왕후의 능인 제릉(齊陵)은 현재 [[개성시]] [[판문구역]] 대련리[* 대한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에 따르면 [[미수복 경기도|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있다. [[조선]] 개국^^(1392)^^ 직전에 한씨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 가계 == * 친정 * 아버지 :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 * 어머니 : 삼한국대부인 [[삭녕 신씨|신씨]](三韓國大夫人 申氏) * 시가 * 시아버지 : [[환조(조선)|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 * 시어머니 : [[의혜왕후|의혜왕후 최씨]](懿惠王后 崔氏) * '''배우자 / 자식''' * '''배우자 : [[태조(조선)|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이성계/이단(李成桂/李旦)''' * 1남 :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 * 며느리 : 삼한국부대부인 [[충주 지씨|지씨]](三韓國府大夫人 池氏) * 손자 : 봉녕군(奉寧君) 이복근(李福根) * 손녀 : 경혜옹주(慶惠翁主) * '''2남 : [[정종(조선)|정종대왕]](定宗大王) 이방과/이경(李芳果/李曔)''' * 며느리 : [[정안왕후]] [[경주 김씨|김씨]](定安王后 金氏) * 3남 :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 며느리 : 삼한국대부인 [[동주 최씨|최씨]](三韓國大夫人 崔氏) * 손자 : 안량공 익평부원군(安良公 益平府院君) 이석근(李錫根) * 손녀 : 선혜옹주(善惠翁主) * 손녀 : 인혜옹주(仁惠翁主) * 4남 :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 며느리 :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민씨]](三韓國大夫人 閔氏) * 손자 : [[의령군(1385)|의령군]](義寧君) 이맹종(李孟宗) * '''5남 : [[태종(조선)|태종대왕]](太宗大王) 이방원(李芳遠)''' * 며느리 : [[원경왕후]] [[여흥 민씨|민씨]](元敬王后 閔氏) * 손녀 : [[정순공주]](貞順公主) * 손녀 : [[경정공주]](慶貞公主) * 손녀 : 경안공주(慶安公主) * 손자 : ^^(폐세자)^^[[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 손자 : [[효령대군]](孝寧大君) 이호/이보(李祜/李補) * '''손자 : [[세종(조선)|세종대왕]](世宗大王) 이도(李裪)''' * 손녀 : [[정선공주]](貞善公主) * 손자 :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 * 6남 : [[덕안대군]](德安大君) 이방연(李芳衍) * 1녀 : [[경신공주]](慶愼公主) -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이애(李薆)에게 하가 * 2녀 : [[경선공주]](慶善公主) -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에게 하가 == 기타 == * 비록 생전에는 큰 대우를 못 받았을 수도 있으나, 태조 이후 모든 [[조선]]의 [[조선/왕사|왕]]들이 그녀의 자손인 걸 보면 최후의 승리자는 신덕왕후가 아니라 신의왕후일 것이다. [[신덕왕후]]의 경우 후처이면서 [[왕비]]가 된 어정쩡한 위치와 장자도 아닌데다 막내로 어리기까지 한 친자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을 [[세자]]로 옹립하면서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가, [[태종(조선)|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의 [[어그로]]를 대차게 끌어서 결국 [[1차 왕자의 난]]의 명분을 적극 제공했기 때문.[* 그녀가 살아만 있었어도 신의왕후 소생들이 함부로 하기 힘들었겠지만 그녀는 나이 40에 일찍 죽었다.] 이 [[1차 왕자의 난]]에서 [[신덕왕후]]는 [[무안대군]] 등 자신의 두 아들과 사위(흥안군 이제)까지 살해당하면서 완전히 대가 끊기고 말았다. 게다가 사후 그녀를 미워한 [[태종(조선)|태종]]에 의해 도성 밖으로 묘지가 옮겨진 이후 석물들이 광통교 다리가 되어 거꾸로 파묻히고, 묘지도 [[후궁]]격으로 격하되어 이장되었다가 [[현종(조선)|현종]] 대에서야 겨우 [[왕비]]의 예로 복권되었다. * 그녀의 사후에 아들 [[태종(조선)|태종]]이 [[양녕대군]]에게 양위를 시도했을 때 당연히 [[신하]]들이 결사코 반대하여 교착 상태에 놓일 무렵, [[태종(조선)|태종]]의 꿈에 밤마다 [[신의왕후]]가 나타나 울며 “네가 나를 굶기려 하느냐?”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608026_001|야사가 아니라 공식 기록이다.]] 이를 들은 [[이숙번]]은 “[[양녕대군|어린 세자]]에게 무리하게 [[조선/왕사|보위]](寶位)를 물려주어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진다면 [[신의왕후|모후]]께서 [[저승]]에서 굶는게 당연하다”고 해몽하였고, 이후 마침내 [[태종(조선)|태종]]이 수긍하고 [[옥새]]를 상서사에 갖다놓음으로써 열흘 동안의 양위 소동이 끝나게 된다. 죽어서도 [[양녕대군]]이 [[조선/왕사|왕]]이 되는 사태를 막은 크나큰 공을 세운 셈.[* 물론 [[태종(조선)|태종]]의 당시 양위 시도 자체는 [[세종(조선)|충녕대군]] 때와 달리 [[태종(조선)|태종]]도 아직 젊고 [[양녕대군|세자]]도 어려서 명백한 [[무리수]]였으므로 태종의 [[정치]]적 양위쇼로 보는 견해가 주류이다.] * 신의왕후의 집안인 청주 한씨 집안의 조선 왕비들은 대대로 거의 아들을 낳았다.[* 사실 거의라기보다도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들을 낳았다. 그 공혜왕후조차 충분히 낳을수 있는 나이임에도 요절한것을 감안하면 청주 한씨 집안이 유독 아들을 잘 낳는 기운을 타고난게 아닌가 싶을 정도.] 특히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 한씨는 조선 중•후기 왕비 중 가장 많은 아들을 낳았으면서 신의왕후 본인과 똑같이 6명이나 낳았다. == 대중매체에서 == * 1983년 [[KBS]] 드라마 《[[개국(드라마)|개국]]》에서는 배우 [[태현실]]이 연기했다.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추동궁 마마>에서는 배우 [[김소원(성우)|김소원]]이 연기했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한영숙(성우)|한영숙]][*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엄 상궁 역.]이 연기했다. 극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정도로 처음 출연할 때부터 병으로 골골대더니 몇 화 안가 [[사망]]한다.[* [[이성계(용의 눈물)|이성계]]는 경처인 [[신덕왕후(용의 눈물)|신덕왕후]]의 질투나 시샘 등으로 인해서 자주 보러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임종 직전에 뒤늦게 다가와서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고생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만을 표했음에도 와줘서 고맙다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뛰어난 아들들에 대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들에 대한 관점을 잘 알고 있는 말을 자주 한다. 이후 [[이방원(용의 눈물)|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에 성공하고 정종이 등극한 후 강녕전에 걸려있던 신덕왕후의 초상을 떼 버리고[* 정종과 같이 정사에 관하여 논의하던 와중에 아버지가 신덕왕후 사후에 제작한 초상화를 보고서는 분기탱천하여 대뜸 잡아다가 던져버린다.] 신의왕후의 초상을 새로 거는데 이 때 정종의 명으로 새로 그린 [[초상화]]로 잠깐 얼굴을 비춘다.[* 이 때 동생인 이방원과 같이 초상화를 보는데 이전에 신덕왕후의 초상화를 내팽개칠 때와는 180도 달라진 활짝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언급은 되지만 등장하지 않는데 제37화에서 죽었을 때 장례 정도만 나온다.[* [[이성계(정도전)|이성계]]가 장례로 [[고향]]에 갔던 이 때 [[정도전(정도전)|정도전]]은 [[정몽주(정도전)|정몽주]]의 [[탄핵]]을 받았다.] [[진안대군|이방우]]가 [[거지]]꼴로 돌아다니다가 어머니 [[장례식]] 보고 들어온건 덤. 나오는 아들들이 5명이 아니라 6명이다.[* 실제로 정안대군 이방원 밑에 [[덕안대군]] 이방연(李芳衍)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조선]] 건국 전에 죽었고 관련 사료가 거의 없다. 1385년(고려 [[우왕(고려)|우왕]] 11) 을축방(乙丑榜) 문과에 동진사 1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KM_5COc_1385_001405|급제한 뒤]]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다는 것 정도만이 대표적으로 알려진 내용. 따라서 비중이 없으며 기록이 별로 없어 [[사극]]에서 등장이 거의 없다.] 스토리 전개가 빠르다 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은 최대한 생략하는 편. 신의왕후 한씨 역시 등장해봐야 딱히 비중이 크지도 않을 것이고 엮일만한 스토리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예수정]]이 연기했다. 그간 스킵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23년만에 사극에 재등장했다. [[신의왕후(태종 이방원)]] 항목 참조. [[분류:조선의 왕비]][[분류:1337년 출생]][[분류:1391년 사망]][[분류:청주 한씨 예빈윤공파]][[분류:금야군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