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시용무보.jpg]] [목차] == 개요 == 時用舞譜. [[조선]] [[세조(조선)|세조]] 재위 시기에 왕의 명으로 [[종묘제례악]]의 연주 순서와 춤의 모습을 실제 동작의 형태에 따라 그림과 문자로 기록하여 남긴 무보. 현재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 편찬시기 논란 == 시용무보는 발견된 이래 2종류의 연대추정설이 제시되어 왔다. 먼저 책에 수록된 내용을 보았을 때 세조가 종묘제례악을 처음 창시한 후 이를 교습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임은 분명하다. 첫번째는 세조 대로부터 1626년([[인조]] 4년) 또는 [[대악후보]](大樂後譜) 편찬 이전에 만들어진 무보라는 설이다. 1626년(인조 4년)에 보태평 중 용광과 정명의 두 악장을 합치고 [[선조(조선)|선조]]가 지은 중광장(重光章)을 용광정명 다음에 넣었고, 1769년(영조 45년)에 편찬한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용광과 정명이 용광정명으로 합장(合章)된 데 비하여 시용무보에서는 용광과 정명이 분장(分章)되고 중광(重光)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즉 세조가 종묘제례악을 창시한 이후 길게 보면 1769년, 짧게 보면 1626년 이전에 만들어진 책인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아예 종묘제례악을 처음 만들었던 세조 당대에 만들어진 책이라는 설이다. [[세조실록악보]], [[대악후보]], [[속악원보]](俗樂源譜)와 비교한 결과 세조실록악보와 강(綱), 행법(行法) 등이 완전히 일치하므로 1463년(세조 9)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 세조의 명으로 그의 재위 시기에 만들어진 책임이 거의 확실시되어가는 분위기다.[[http://www.happycampus.com/doc/2360932|논문 : 『 시용무보 』 의 편찬연대와 『 시용무보 』 속에 나타난 술어 구성체제의 특징]] == 내용 == 세조가 처음 창안한 종묘제향(宗廟祭享)의 일무와 춤사위 및 각 부위의 움직임, 공간 이동과 방향, 반주음악 등을 문자, 도상, 기호, 그림을 사용하여 표기하고 독자들이 책을 보고 이를 완벽하게 따라할 수 있게끔 만들어놓은 일종의 교본이다. 시용보태평지무(時用保太平之舞)의 희문(熙文), 기명(基命), 귀인, 형가(亨嘉), 집녕(輯寧), 융화(隆化), 현미(顯美), 용광(龍光), 정명(貞明), 대유(大猷), 역성(繹成), 그리고 시용정대업지무(時用定大業之舞)의 독경(篤慶), 탁정(濯征), 선위(宣威), 신정(神定), 분웅(奮雄), 순응(順應), 총유(寵綏), 정세(靖世), 혁정(赫整) 연주 때 무대에 오른 한국의 고전 춤사위들을 하나하나 그림과 문자를 통해 세세히 기록해 남겼다. 총 그림 수는 666개로, 문무(文舞) 306개, 무무(武舞) 360개의 동작을 그려놓았다. 그 외에 당시 무용수들이 사용한 일무의 복식과 무구 또한 자세히 그려져 있다. 현재 한국에서 고전 무용의 실체를 그 당대에 그림과 악보로 자세히 설명해놓은 것은 오직 이 시용무보 하나 뿐이다. 특히 수백여년 전 고대 무용의 형태를 수백여점의 그림을 통해 동작 하나하나마다 세세히 표현한 책은 전세계적으로도 이 책이 유일하며 그야말로 한국의 전통문화사상 일대 보배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조선 말기인 [[고종(대한제국)|고종]]대에 만들어진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忽記), 근현대에 만들어진 [[조선민족무용기본]](朝鮮民族舞踊基本)과 함께 우리나라 고전 3대 무보로 불리며, 문자를 주로 사용하여 춤의 진행을 글로 풀어 설명한 두 책과 달리 춤의 동작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상세히 묘사하였기 때문에 무보로서의 완성도는 오히려 수백여년 뒤에 만들어진 두 무보보다도 더 높다고 평가받는다. == 기타 == 시용무보가 발견된 후 그 내용을 토대로 현재의 종묘제례악이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 같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0011171|한겨레 : ˝일제,종묘제례악 가사 왜곡˝]] '시용무보의 무절 구조분석과 현행 종묘일무의 비교연구'를 통해 세조 당시에는 ‘황(皇), 성(聖), 종(宗), 용(龍)’ 등으로 묘사하던 임금이 '아조(我祖)’로 격하됐고 일본을 도이(‘섬 오랑캐’라는 뜻)라고 불렀던 부분도 사라지는 등 내용과 형식이 많이 바뀌었으며, 복식도 종묘 전용 국가제례복식에서 일반 연회복식(잔치를 열 때 입는 옷)으로, 춤도구인 ‘검’도 일반 군사용 제사에 쓰이는 ‘검’으로 바뀌는 등 전체적인 제례의 격식이 낮춰졌다고 말하고 있다. 해당 내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기능보유자 김용이 발간한 '극일을 위한 김용의 종묘제례 일무보 『시용무보』의 원리와 실제'에 나와있다.[[http://www.yes24.com/Product/Goods/114678427]] 2006년 문화재청은 KBS뉴스 전화인터뷰에서 복원 계획을 잡고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까지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으며 유네스코에는 여전히 잘못된 종묘제례악이 등재되어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824647]] == 외부 링크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107&cid=46666&categoryId=46666|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시용무보]]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20803&cid=50826&categoryId=50826|문화원형백과 : 시용무보]]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8220&cid=40942&categoryId=33383|두산백과 : 시용무보]] * [[http://blog.naver.com/gugak1951/220713929618|국립국악원 공식 홈페이지 : 조선시대에도 무보(舞譜)가 있었을까?]]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13815&cid=50290&categoryId=50290|용어해설 : 시용무보]] [[분류:조선의 도서]][[분류:국립국악원 소장품]][[분류:서울특별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