施得 생몰연대 미상 [목차] == 개요 == [[신라]] 중대 [[문무왕]] 시대의 수군 지휘관. 이름이나 관등을 보았을 때 [[진골]]이 아닌 [[6두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670년의 [[설오유]]와 함께 [[나당전쟁]] 당시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대병력을 인솔한 유이한 사례 중 하나. == 생애 == [[나당전쟁]]이 진행되던 7세기, [[당나라]]는 육로를 이용해 675년 대대적으로 신라를 침공했으나 천성 전투와 [[매소성 전투]]의 승리로 패퇴했고 이듬해인 676년 11월에는 절치부심한 [[설인귀]]가 당나라 수군을 이끌고[* 당나라는 앞서 [[백제]], [[고구려]]와의 싸움 때도 [[황해]]로 대규모 수군을 보내 쏠쏠한 성과를 봤다.] 신라의 [[서해]]로 쳐들어오게 된다. >(중략)겨울 11월에 사찬(沙湌) 시득(施得)이 수군[船兵]을 거느리고 설인귀(薛仁貴)와 소부리주(所夫里州)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권7 7 신라본기 문무왕 16년 11월(676년 음력 11월) 기사 당시 17관등 중 8관등 사찬 관등에 있던 장수 시득이 소부리주[* 옛 [[백제]]의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과 인근 지역을 관할]에 있는 [[금강]] 하구 기벌포[*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에서 100척 정도의 병선으로 맞서 싸웠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해 크고 작은 전투 22번에서 모두 승리했고 4천여 명의 수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이 나당전쟁의 마지막 싸움인 [[기벌포 전투]]이며 이 전투를 끝으로 당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완전히 포기했고 7년간에 걸친 나당전쟁이 끝이 났다. == 창작물에서 == [include(틀:스포일러)] 소설 [[삼한지]]에서는 시득을 [[김유신]]과 [[천관녀]] 사이의 서자 김시득으로 해석하는 파격적인 설정을 내놓기도 했다. 김유신의 아버지로 시작한 소설이 김유신의 아들로 마무리되는, 어찌보면 수미상관으로 작품을 마무리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각주] [[분류:몰년 미상]][[분류:신라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