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 習鑿齒 (?~384년경) [목차] == 개요 == [[중국]] [[동진]]의 역사가로 [[자(이름)|자]]는 언위(彦威), 양양(襄陽) 사람이다. 《양양기》(襄陽記)와 《한진춘추》(漢晉春秋)[* 《[[구당서]]》 경적지《[[신당서]]》 예문지에 따르면 총 54권이다.]의 저자로 유명하다. == 생애 == 대대로 양양 지역에 세거하던 호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조상으로는 [[촉한]]을 섬겼던 [[습정]]이 있다.[* [[방통]]의 동생 [[방림]]의 아내가 습정의 누이동생이었다.] 습착치는 젊은 시절 뜻을 가지고 많이 배워 학식을 가졌으며 문필로 유명했다. 형주자사 [[환온]]이 그를 등용하여 종사로 삼았고 강하상 [[원교]]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환온에게 추천하여 서조주부에 임명되었으며 별가로 승진했다. 환온이 출정 할 때 그를 대신하여 지키기로 임하여 종군하기도 하였고 책임 있게 맡길 수 있었던 자리를 모두 견뎠다. 요직을 맡아 실적이 있었고 논의에 뛰어나 환온도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후대하였다. 그러나 수도 건강에 갔을 때 회계왕 [[간문제(동진)|사마욱]][* 훗날 간문제로 즉위했다.]의 환대를 받은 뒤 환온이 '회계왕은 누구를 닮은 인물인가?'라고 습착치에게 물었는데 '아직도 그와 같은 분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환온은 화내었고 습착치는 호조참군으로 좌천되었으며 형양태수를 역임했다. 환온이 그 당시에 찬탈을 꿈꾸고 있었고, 그 명분을 주지 않는 습착치에게 원한을 품은 것이다. 이때 습착치는 한진춘추 54권을 저술하였다. 습착치는 그 후 병을 앓아 고향 양양에 돌아갔지만 양양이 저족 [[부견]]의 공격을 받아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영토가 되었다. 부견은 그의 이름을 듣고 습착치를 그의 친구인 승려 도안과 초빙하여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아 후대하였다. 습착치는 다릿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부견은 '[[서진|진]](晉)이 [[오(삼국시대)|오]](呉)를 평정했을 때에는 [[육기|육씨]] [[육운|형제]]를 얻었지만[* 육기, 육운은 [[육손]]의 손자이자 [[육항]]의 아들들이다. 모두 시대의 준걸들로 인정받았다.] 지금 우리들이 [[한나라]] 남쪽을 차지하여 얻은 인물은 한 명으로 반분되었소'라고 말했다. 그 후 습착치는 양양에 돌아갔는데 얼마 후 동진이 양양을 탈환하자 조정은 습착치에게 국사 편찬을 담당하여 시작하려고 했지만 그 무렵 사망했다. 죽기 전에 조위를 찬탈자로 보는 자신의 이론을 비난하던 반론에 반박했다. 그의 아들 습벽강(習辟強)은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고 아버지와 같은 풍격이 있어 관직이 표기장군, 종사중랑에 이르렀다고 한다. == 한진춘추 == 습착치의 대표 저작인 한진춘추는 [[후한]] [[광무제]]로부터 [[서진]] [[진민제|민제]] 시대까지 서술한 역사서이다. 습착치는 한진춘추에서 [[위(삼국시대)|조위]]는 후한 [[헌제]]를 [[협박]]하여 거짓 [[선양]]을 받은 역신 [[조비]]가 세운 나라이므로 [[사마염]]이 조위로부터 선양받아 [[서진|진나라]]를 세운 것 역시 정통성에서 유효하지 못하다고 평하였다. 또한 [[사마소]]가 촉한을 평정함에 따라 한이 멸망하여 진나라가 흥했다고 평가하여 하늘의 뜻은 세력이 있고 권위를 강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일명 '''[[촉한정통론]]'''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습착치가 살았던 때는 사마씨가 강남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습착치가 촉을 정통으로 삼은 것은, 중국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던 동진을 삼국 시대 촉한에 투영한 것이었다. 즉 습착치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정치 체제인 동진과 그 주인 사마씨를 위해 복무했던 것이다.[* 이는 진수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습착치는 진나라와 사마씨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서술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사마사]]가 [[제갈각]]에게 패했을때 사과하자 한 찬양이나 [[사마소]]가 [[제갈탄]]을 물리칠 때 찬양을 들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도 그 언사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평한 바 있다.] 한진춘추가 촉한을 정통으로 세운 것은 남조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쳐, [[유송]] 이후의 사가들도 습착치가 옳고 진수는 그르다고 주장하고는 하였다. 고국항 등 근현대의 사학자들은 이러한 봉건적인 전통관념의 한진춘추보다는 진수의 삼국지가 실제 역사에 부합한다고 하여 정사 삼국지를 재조명한 바 있다. 한진춘추는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삼국지(정사)|삼국지]]의 [[배송지]] 주석에 내용이 다수 인용되어 있다. == 여담 == 그의 후손으로는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국가주석]]이 있다. [[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384년 사망]][[분류:중국의 역사가]][[분류:샹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