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기원전 211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2> {{{#ffffff {{{+3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br]{{{-1 [[라틴어|{{{#white 라틴어}}}]]: Spurius Carvilius Maximus Rug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11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카르빌리우스(조부)[br][[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34년 || ||<#800080> {{{#ffffff '''전임''' }}}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br][[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234년 집정관)|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br][[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28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234년 집정관)|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800080> {{{#ffffff '''후임''' }}}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br][[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기원전 22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카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따고 한다. 아버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93년과 기원전 272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일부 학자들은 두 카르빌리우스가 집정관을 역임한 년차가 40년이나 되기에 부자 관계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아그노멘인 '루가(Ruga)'는 '주름진 얼굴'을 의미한다. 기원전 234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기원전 234년 집정관)|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처음에 코르시카를 임비로 배정받아 그들의 봉기를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후 사르데냐를 통치하던 [[법무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가 사망하고 사르데냐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즉시 사르데냐로 가서 진압하고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와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그는 아내가 불임이라는 이유로 이혼한 최초의 집정관이었다고한다. 기원전 228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2번째로 집정관에 올랐다. 이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하는 고대 저자는 오직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뿐이다. 키케로는 저서 <노년에 관하여>에서 집정관 루가는 호민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농지법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데 비해 파비우스는 극력 반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폴리비오스]]는 플라미니우스가 호민관을 맡아서 이 법안을 제시한 시기는 기원전 232년이며, 기원전 228년에는 법무관을 맡아 농지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 직후, 그는 각 라틴 부족에서 2명의 대표를 차출해 로마 시민권을 주고 칸나이에서 전사한 [[원로원]] 의원들의 공백을 그들로 채우자고 주장했다. 이는 이탈리아 동맹시들을 로마에 묶어놓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그렇게 했다간 로마 시민의 순수성과 우수한 자질을 잃게 되니 논의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고 원로원은 이에 따라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211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그는 사망할 당시 [[아우구르]]였으며,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가 아우구르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키케로의 저서 <연설가에 관하여>에 따르면,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는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큰 부상을 입어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는 이 모습에 부끄러워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이길 꺼렸다. 이에 그의 어머니가 "친애하는 스푸리우스. 당신의 모습을 보여줘라. 모두가 당신의 업적을 상기할 것이다."라고 격려했다고한다. 이 인물이 기원전 234년과 기원전 228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