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서울특별시의 무덤]][[분류:금천구]][[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분류:순흥 안씨]] ||<-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73호 ||<|2> ← || '''74호''' ||<|2> → || 75호 || || [[탑골공원#s-3.3|탑골공원 팔각정]] ||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 || [[지장사 철불좌상]]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 || ||<-2> {{{#fff {{{+1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br]{{{-1 順興安氏 良度公派 墓域}}}}}}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서울)|시흥동]] 산126-1번지 || || '''{{{#fff 시대}}}''' || [[조선시대]]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 || '''{{{#fff 수량 / 면적}}}''' || 분묘 5基, 석물 32基, 토지 2,247.1㎡ || || '''{{{#fff 지정연도}}}''' || [[1990년]] [[6월 18일]]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 [[순흥 안씨]] 양도공파 종회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 (1).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순흥안씨양도공파묘역.jpg|width=100%]]}}} || || {{{#F0AD73 '''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 [[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248&ccbaKdcd=21&ccbaAsno=00740000&ccbaCtcd=11|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r][[http://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244&ccbaKdcd=21&ccbaAsno=00740000&ccbaCtcd=11|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목차] [clearfix] == 개요 == [[순흥 안씨]] 양도공파의 파조인 양도공 안경공과 그 후손들의 묘역.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서울)|시흥동]]에 있다. == 상세 == 이 문서에서 다루는 묘역은 현재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묘 5기의 영역이다. 양도공 안경공(良度公 安景恭)과 그의 아들 정숙공 안순(靖肅公 安純), 그리고 안순의 세 아들인 문숙공 안숭선(文肅公 安崇善), 소윤공 안숭신(小尹公 安崇信), 안천공 안숭효(安川公 安崇孝)의 묘이다. [[15세기]]에 조성한 묘역으로, 당대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0년 6월 18일에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받았다. 원래는 안경공과 안순, 안숭선의 묘만 문화재로 관리받았으나 2017년 2월 9일에 [[서울특별시]]에서 안숭신, 안숭효의 묘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지정했다. 안숭신, 안숭효의 묘 역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처음부터 같이 지정하시지 그러셨어요-- 석물은 총 32기이다. 묘비, 혼유석, 상석 등 묘에 필요한 기본적인 석물은 묘마다 각각 1기 씩 있다. 장명등의 개수는 3기(안경공, 안순, 안숭효)이며, 신도비는 2기(안순, 안숭선)가 있다. 문, 무인석은 묘마다 있는데, 안숭선의 묘에는 4기가 있고 다른 묘에는 각각 2기 씩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흥녕부원군부조묘.jpg|width=100%]]}}} || || {{{#F0AD73 '''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에 있는 사당 흥녕부원군부조묘[* [[http://guro.grandculture.net/guro/search/GC03000358?keyword=%EC%88%9C%ED%9D%A5%EC%95%88%EC%94%A8%20%EC%96%91%EB%8F%84%EA%B3%B5%ED%8C%8C%20%EB%AC%98%EA%B5%B0&page=1#mediaview|사진 출처 - 디지털구로문화대전.]]] '''}}} || 서향을 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현대식 재실이 있고[* 단, 지붕에 [[기와]]를 올렸다.] 재실 위쪽에 [[사당]]이 있다. 사당 이름은 '흥녕부원군부조묘(興寧府院君不兆廟)'이다. [[사당]]을 기준으로 왼쪽에 안순과 안숭신, 안숭효의 묘가 있고, 오른쪽에 안경공과 안숭선의 묘가 있다. == 인물 == === 안경공 === 안경공은 [[조선]] 개국 [[공신]]으로, [[자(이름)|자]]는 손보(遜甫)이다. 1347년([[충목왕]] 3년)에 [[경상도]] [[순흥면|순흥부]]에서 태어나 [[고려]] [[공민왕]] 때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우왕]] 시절에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경상도 안렴사를 지낼 때 사노비들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고, [[공양왕]] 때는 [[정몽주]]를 몰아내려다가 도리어 좌천당했다. 이를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태조(조선)|이성계]] 측의 일원이 된 듯 하다. [[조선]] 건국 당시 좌대언으로서 아버지 안종원과 함께 참여했다. 그 공으로 [[중추원]] [[도승지]] 직을 제수받고 다음 해에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지역 행정 업무를 주로 맡아 전라도관찰출척사를 거쳐 수도 [[한성부|한성]]의 최고 책임자인 [[한성판윤|판한성부사]]와 옛 수도 [[개성시/역사|개성]]을 책임지는 판개성부사를 역임했다. 개성부사를 지내던 중에 [[1차 왕자의 난]]으로 살해당한 [[정도전]]과 [[남은]]의 죄를 줄여줄 것을 [[태종(조선)|태종]]에게 간언했다가 대간에서 탄핵을 받았다. 1416년(태종 16년)에는 집현전 대제학이 되면서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격상되었다. 1421년([[세종(조선)|세종]] 3년)에 75세[*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로 사망했고 [[시호]] '양도(良度)'를 받았다. === 안순 === 안경공의 아들로, [[자(이름)|자]]는 현지(顯之)이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태어나 [[세종(조선)|세종]] 시기에 호조참판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이후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세종 중반에는 판중추원사와 호조사 및 [[의정부]] 찬성사를 지냈고 1437년(세종 19년)에는 [[기근]]이 일어난 [[충청도]]로 내려가 백성들을 구휼했다. 앞의 이력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주로 나라 살림과 관련있는 일을 많이 맡아서 했으며, 재정을 다루는 책임자였던 만큼 매사에 엄격하고 강직했다고 한다. 1440년(세종 22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시호]] '정숙(靖肅)'을 받았다. === 안숭선 === 안순의 차남으로, [[자(이름)|자]]는 중지(仲止)이다. 처음에는 [[음서]]로 [[관직]]을 지냈다가 1420년([[세종(조선)|세종]] 2년)에 [[문과]]에 급제[* 장원]한 후 [[사헌부]] 지평으로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조전랑, [[대사헌]], 공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 고위직을 주로 역임했으며, [[명나라]]에 여러 번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병조판서 역임 중에 지춘추관사를 겸하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고,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받았으나 병으로 몇 달 못가 사직했다. 이후 예문관대제학 직을 맡았으며 [[의정부]] 좌참찬으로 있던 1452년([[문종(조선)|문종]] 2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 안숭신 === 안순의 3남이다. 1395년([[태조(조선)|태조]] 4년)에 금천에서 태어나 오위도총부 사직과 형조 정랑 직을 맡았다. [[함경도|함길도]] 도사를 역임하던 중 구휼 실패로 파면당했고, 파면 한 달 후에 [[황희(조선)|황희]]의 천거로 경기좌도 찰방이 되었다가 [[세종(조선)|세종]]에게 비판받기도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da_11110010_002|#]] 1441년(세종 23년)에 사망했다. === 안숭효 === 안순의 4남으로, [[자(이름)|자]]는 계충(季忠)이다.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호조 참의와 지사간원사를 역임했다. [[단종(조선)|단종]]이 왕이 된 후에는 경기도관찰사와 덕녕부윤 직을 맡으면서 수양대군의 즉위에 협력했다. 수양대군이 [[세조(조선)|세조]]로 즉위한 뒤에는 대사헌과 공조 및 호조 참판으로 일했고, 1459년(세조 5년)에는 동지중추원사 겸 [[충청도]]관찰사로 제수받아 충청도로 갔는데, 이때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들을 엄벌하여 백성들의 인망을 얻었다. 그러나 너무 열심히 일했던지 재직 중에 중병에 걸려 이듬해에 충청감영에서 세상을 떠났다.[[http://sillok.history.go.kr/id/kga_10603011_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