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 荀攸 (157년 ~ 214년)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 말기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의 인물. [[군벌]]인 [[조조]]를 섬겼던 [[군사#s-6]](軍師)로, [[자(이름)|자]](字)는 공달(公達)이다. [[시호]]는 경후(敬侯). [[삼국지]] 위서에서는 [[순욱]], 순유, [[가후]]를 같은 권에 모았다. 즉 '''조조군 최고의 3대 [[참모|책사]]''' 중 하나로 꼽은 것. 실제로 순유는 전장에서 활약해 순욱 다음가는 공적을 쌓은 조조군 [[참모|모사]]라 한다. 조조의 평가로도 순욱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순유라고 하며 적을 쳐부순 것은 모두 순유의 공적이라고 할 정도로 압도적인 군공을 세웠다.[* 또한 조조에게만 은밀하게 책략을 진언하기도 했다고 하며, 그 탓에 다른 사람들은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순욱의 경우도 조조가 순욱의 공을 으뜸이라고 추켜세우면서 함께 짠 계략이 얼마인데 라고 하는 것을 보면 순욱처럼 알려지지 않은 공적도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같이 조조를 섬겼던 순욱의 [[칠촌]] [[조카]]로[* 가족 관계만 놓고 봤을 때는 조카였지만 나이는 순욱보다 6살 많았다. 이들과 비슷한 관계로는 후기 오나라의 [[손량]]&[[손준]]이 있다. 대신 이쪽은 나이 차가 순욱&순유의 4배인 24살이다.] 순담(荀曇)의 손자이고, 순이(荀彝)의 아들이자, 순집(荀緝), 순적(荀適)의 아버지이다. 순유의 [[처첩]]은 [[아무(삼국지)|아무]] 한 명만 기록에 남아있다. == 생애 == === 초기 생애 === 조부인 순담은 [[광릉]][[태수]]가 되었다. 아버지인 순이는 [[주(행정구역)|주]]의 [[종사]]로 있었는데 순유가 어렸을 때 죽었다. 순유가 8살 때, 순유의 [[숙부]]인 [[순구(후한)|순구]]가 술에 취해 잘못하여 순유의 귀에 상처를 낸 적이 있었다. 순유는 숙부의 방을 들어갔다 나왔다할 때 언제나 귀를 숨기고 숙부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였다. 숙부는 뒤늦게 이 일을 듣고 알게 되어 놀라 사과하였고, 높이 평가하였다. 순유가 13살 때, [[장권]](張權)이라는 사람이 순유에게 순유 아버지의 [[묘지기]]를 하고 싶다고 신청하였다. 순유는 이에 의혹을 품고 숙부인 [[순구]]에게 "모습이 이상해보입니다. 혹시 뭔가 나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였다. 순구는 짚이는 일이 있어 장권의 조사를 해 보았고, 역시 장권이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순구는 순유의 식견을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하진]]이 정권을 잡았을때 순유는 [[원소(삼국지)|원소]]와 [[음수(삼국지)|음수]] 등에게 천거되어 황문시랑에 임명되나, 이후 [[동탁]]이 정권을 잡자 그 횡포에 분노하여 [[정태]], [[하옹]] 등과 함께 동탁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감옥에 투옥되어[* 이 시기에 [[하옹]]은 감옥에서 근심으로 죽었다.] 사형이 결정되었다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동탁이 [[왕윤]]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 이는 〈순유전〉의 기술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위서(역사책)|위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순유가 동탁을 설득해서 풀려났다'라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 이는 순유가 동탁에게 줄을 대서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순유가 [[채옹]] 같은 친동탁 청류들에게 구명로비를 해서 풀려난 게 아닌가라고 보기도 한다. 대체로 [[기전체]]의 [[열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위서》 쪽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순유가 동탁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므로 동탁이 순유를 그 즉시 참했어도 할 말이 없는데, 감옥에 가둬두고 처형날짜만 기다렸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후 활동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자신이 원하던 [[익주]]의 촉군태수(蜀郡太守)가 되려 했으나, [[유언(삼국지)|유언]]이 이미 교통로를 끊어버렸기에 [[형주]]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헌제]]를 자신의 본거지로 맞이한 조조에게서 편지가 오고, 군사로써 그를 섬기게 되었다. === 조조 휘하 === [[남양]]에 주둔한 [[장수(삼국지)|장수]]를 공격할 때, '''"[[유표]]가 [[장수(삼국지)|장수]]에게 식량 공급을 계속해주진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로 사이가 멀어질 테니, 출병을 늦춘다면 유표가 장수를 돕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진언했는데, 이를 듣지 않고 출병을 서두른 조조는 과연 [[가후]]의 군략 + [[유표]]의 원군에 패퇴하고 만다. 이후 퇴각전에서 [[복병]]을 준비해 1차 추격을 차단하는데, 가후가 패잔병을 이끌고 온 장수에게 2차 추격을 진언하고 결국 2차 추격전에서는 조조군이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조조의 배후에서 [[서주(중국)|서주]]의 [[여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때 많은 사람들은 여포를 친다면 장수와 유표에 의해 배후를 찔리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였으나, 순유는 여포가 용맹하며 [[원술]]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세력이 규합되지 못하고 있을 때 [[토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조는 [[여포 토벌전|서주의 여포 토벌]]에 나서 [[하비]]까지 진군하였다. 조조가 철군을 하려고 할 때, 순유와 [[곽가]]는 조조를 필사적으로 말렸고, 순유의 [[수공]] 계책으로 하비성을 수몰시켜서 여포를 사로 잡게 된다. >[[위태조|태조]]의 군은 하비까지 이르렀는데 여포가 퇴각하여 굳게 지키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연이어 싸우다 보니 병사들은 피로해져 태조는 돌아가려 했다. 순유와 곽가가 말했다. >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데, 지금 세 번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니 그 예기(銳氣)가 쇠퇴하였습니다. [[삼군]](三軍)에서 [[장수]]를 주(主)로 하여 그 쇠미한 곳에 주력하면 군대는 싸울 뜻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진궁]](陳宮)에겐 지모가 있으나 더디니, 지금 여포의 기세가 다시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의 지략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면 여포군을 가히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 >이에 기수(沂水)와 사수(泗水)를 끌어 성쪽으로 물을 대니, 성에서 물이 넘쳐나 여포를 사로잡았다. 조조는 순유의 공을 치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 >“[[안회|안자]](顔子)나 [[영무자]](寧武子)와 같은 성현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순유만큼은 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하비성 수공의 공 역시 순유의 공으로만 기록되며, 순유만이 치하를 받았다. [[관도대전]]에서는 '''주력[[참모]]급'''으로 진언이나 작전을 많이 건의했다.[* 의외로 곽가는 이때 활약이 없어 종군했다는 정도가 전부이다.(...)] 전초전에서 [[원소]]가 [[안량]]으로 [[백마]]를 포위한 뒤 본대는 안량의 배후에 주둔하며 백마를 인질삼아 조조에게 결전을 강요하자 순유는 [[성동격서]]의 계책으로 [[하내]]를 쳐 원소 본대를 분산시키는 책략을 진언하여, 안량을 독군의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격파하도록 설계했고, 원소의 부하 [[문추]]와 [[유비]]의 추격을 받자, 이번에는 치중대를 미끼로 쓰는 방안을 진언하여, 덫에 걸린 문추를 토벌하였다. 그 뒤, 조조는 순유의 진언에 따라, [[서황]]과 [[사환]]에게 원소의 부하인 [[한순]]이 이끄는 수송대를 공격하게 하여, 수천 대의 곡물 수송 수레를 불태웠고, [[허유]]가 투항해 오면서 [[순우경]]의 오소 숙영 사실을 알리자 모두가 이를 의심했으나 가후와 함께 이 계책을 지지했고, 조조가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오소를 기습하는 동안 [[조홍]]과 함께 관도의 수비를 맡아 전력이 집중된 원소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오소의 성공으로 원소군 수뇌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장합]]과 [[고람]]이 투항해 오자 진심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조홍]]을 설득하여 [[투항]]을 받아들이게 하며 역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조조에게 유리하게 전장의 판도를 움직인 거의 대부분의 상황들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에 사실상 조조의 모사들 중에서는 '''[[관도대전]] 최대의 공로자였다.''' 조조가 유표 정벌에 나설 때 [[원상]]과 [[원담]]의 다툼이 발생하여, 전투에서 패한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을 제안해왔다. 다른 신하들은 유표 정벌을 우선하도록 권유하였으나, 순유는 이 기회에 원담과 원상의 다툼을 틈타 원씨의 땅을 빼앗자고 진언하였고 이 전투에서 순유도 종군하였다. 조조는 순유의 공적을 상주하여 크게 칭찬하였고, 순유는 능수정후(陵樹亭侯)로 봉해졌다. [[하북]] 평정 등에서도 순유의 공이 컸기에, 조조는 순유에게 [[고조]] [[유방]]이 [[장량]]에게 [[식읍]] 3만호를 스스로 선택하게 했듯이, [[봉토|봉읍]]을 선택하게 해주겠다고까지 말한다. === 죽음 === 214년 조조가 위왕이 되는 것을 찬성했다. 조조의 [[오(삼국시대)|오]] 토벌에 종군하던 시기 병으로 인해 쓰러져 얼마 안 가 진중(陣中)에서 사망했고, 경후(敬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조는 순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죽기 전 친구인 [[종요]]에게 자신의 경험을 담은 병법, [[전략]]을 담은 책을 주었는데, 훗날 이 책은 분실되었다고 한다.[* 이 [[병서]]가 실전되지 않고 현존하고 있었더라면 후한말 삼국 당대의 중요한 사료 중 하나가 됐을 것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주건평]]전에 따르면 순유와 친하던 종요가 순유가 죽은 후 그의 집안을 정리하며 [[아무(삼국지)|아무]]를 비롯한 순유의 [[첩]]들을 시집보냈다. == 평가 == '''순유는 [[조조]]의 패업을 지탱했던 명군사였다.''' 순유의 외조카인 [[신도]]가 조조가 [[기주]]를 얻을 때 순유가 무엇을 했는지 묻자 순유는 "좌치(=[[신비]])가 원담이 항복하도록 했고, 이에 왕사[* 왕의 군대(=王師)라는 뜻으로 조조를 비유한 것이다.] 가 평정하러 갔을 뿐인데. 내가 아는 것이 뭐가 있겠느냐." 며 자신의 공을 숨겼고, 친지와 집안 식구들 누구도 순유에게 사무에 대한 일을 묻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순유는 평소 스스로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조조는 "순유는 언뜻 보기엔 우둔해 보이나, 내면은 지혜를 가지고 있어 세심하고 용감하며, 선을 과시하지 않고, 번잡하고 성가신 일은 남에게 뒤집어씌우지 않는다. [[안회]]와 영무자([[공자]]의 제자)라도 순유 이상은 아닐 것이다."라고 순유를 높이 평가했다. 조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면서도 [[사치]]를 부리는 일도 없었고, 언제나 겸손하고 친절하여 친구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종요]]와는 절친하여 순유가 죽을 때 남겨진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종요에게 맡기겠다고 유언하였다. 허나 두 아들 [[순집]], [[순적]]이 [[요절]]하여 순유의 집안은 위상이 추락하고 만다. 훗날 순유의 손자 [[순표]](荀彪)[* 순유의 두 아들 순집, 순적 중에 누구의 아들인지는 모른다.]가 성인이 된 후 다시 순유의 [[가문]]을 [[중흥]]시켰다. 진수는 위서에서 순욱, 순유, 가후를 같이 묶었는데, 순욱이 조조군 부동의 1위 참모고 가후가 조비 때까지 살아 장수하며 지위를 누린 조위의 참모인 걸 생각하면 조조 휘하에서의 순유의 활약이 얼마나 굉장했을지를 알 수 있다. 순유는 그가 해놓은 업적에 비해서 저평가를 받는 편이다. 7촌 아저씨 순욱의 공이 워낙 크므로 책사 중 부동의 1위이기는 하지만, 순유는 병법부분에서 최고의 공적을 쌓았음에도[* [[순욱]]의 군략이 순유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순욱이 맡은 내치가 워낙 중요했기에 전장에 직접 많이 나서지 않았을 뿐이다. 실제로 [[조조]]는 전장에 나가서도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편지로 순욱의 조언을 구하였다고 한다. 아쉽게도 해당 기록물들은 순욱이 죽기 전 전부 불태워 없애버렸다고 한다. 또한 조조세력이 미약할 초창기에는 순욱 본인이 직접 참군하기도 하였다. 이후 세력이 어느 정도 커지면서 본진 관리를 하게 된 것.] 후세의 인식에선 개성 강한 [[가후]]와 [[곽가]]에게 밀려 인지도가 낮다. 그러나 실제 기록을 볼 때 조조군 진영 안에서 순유의 공을 능가할 만한 참모는 순욱밖에 없다. 조조군 참모들의 공적을 매긴다면 '''[[콩라인|순욱 다음 가는 부동의 2위인 인물이다.]]''' 순욱도 본래 공적에 비해 대중의 인식이 희미한 편이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조조 다음가는 No.1 이미지는 확고하고 자신의 패업을 이룩하게한 주군과 척을 지고 죽으면서까지 한실을 지키려한 마지막 [[충신]]이라는 흥미로운 스토리 라인이 있어 곧잘 회자되는 데 반해, 순유는 극적인 인상이 없어 캐릭터성도 없고 비중 있게 다루는 창작물도 거의 없다. 나와봐야 순욱 MK-2 취급인 게 상당수. 유능한 평생사를 지닌 사람보다 조용히 살다가 강렬한 한 방의 에피소드 하나를 지닌 사람이 더 유명한 것이 흔한 일이긴 하다. 어떤 의미에선 그냥 꾸준히 잘했다보니 후세에 개성있게 여겨질 만한 일화도 생기지 못했다고 봐야할지도. 순욱의 아들 [[순찬]]은 순유가 신중하고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므로 [[도가]]의 사상에 의거해 '아버지 순욱보다 순유가 더 훌륭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위의 조조의 평가와 순찬의 평가를 볼 때 실제로 그다지 눈에 띄는 언행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위에서 설명했듯 말년에 조조가 위왕에 오르는 것에 찬성한다. 순유 또한 한때는 동탁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의기 넘치는 충의지사였으나, 결국 [[한나라]]에 대한 충성에서 전향하여 조조의 신왕조 [[조위|위나라]]를 더 중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삼국지연의]] ==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의 초기 행적들이 생략되고 [[순욱]]과 같이 조조의 [[연주(중국)|연주]][[목(행정구역)|목]] 시절에 합류한 것으로 나온다. 정사(正史)와는 반대로 순욱과 같이 '''조조가 위왕(魏王)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여 조조의 노여움을 사서 얼마 후 충격으로 병사하지만[* 심지어 조조는 자신의 [[장자방]]과도 같은 인물을 둘이나(다른 한명은 순욱)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잃었다며 자책하여 그의 유언을 받아들여 지금은 때가 아님을 인지하고 위왕에 오르는 것을 미루었다고 묘사되었다.] 이는 연의의 허구다. [[나관중]]이 순유에게 순욱과 비슷한 이미지를 부여한 것뿐. 그래서 한나라를 버리고 [[위나라]]를 지지한 인물이 뜬금 한나라 최후의 충신 중 하나인 정반대 포지션으로 역전되어버려 [[삼국지연의/수혜자|삼국지연의의 수혜자]]로 격상되었다.(...) 사실 이 부분이 제일 유명하긴 하지만 이 부분 외에도 삼국지연의 자체가 순유를 캐릭터로서 다루는 부분에 전반적인 문제가 있다. 요는 실제 역사에서는 그 본인 스스로도 엄청난 역량의 책사 중 한 사람이었던 순유를 자꾸 순욱에 세트로 따라오는 부록 (...) 정도로 출연 시킨다는 점이다. 위와 같이 정사에서는 순유 본인만으로도 큰 업적을 연거푸 쌓은 거물급 책사였는데[* 심지어는 상술했듯 '''순욱의 아들마저도''' 자신의 부친보다 순유가 더 훌륭하다고까지 발언했다.] 연의에서는 자꾸 순욱에 묻어가는 역할로 나온다는 게 문제. 정사에서와 달리 순욱과 유사한 최후를 맞는 것으로 각색된 것도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 미디어 믹스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순유/기타 창작물)] [각주] [[분류:157년 출생]][[분류:214년 사망]][[분류:한나라의 관료]][[분류:영천 순씨]] [include(틀:포크됨2, title=순유, d=2023-01-10 13:5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