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고려 왕후)]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고려 원종의 제1왕후[br]{{{+1 순경태후 | 順敬太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강화가릉.jpg|width=100%]]}}} || ||<-2> {{{#670000 {{{-2 가릉 전경}}} }}} || || '''출생''' ||[[1222년]] || ||<|2> '''사망''' ||[[1237년]] [[7월 29일]] (향년 15세) || ||[[고려]] [[강화군|강도 강화군]] 사당리 사저[br](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 || '''능묘''' ||[[가릉]](嘉陵) || ||<|2> '''재위기간''' ||'''{{{#f9d537 고려 태자비}}}''' || ||[[1235년]] [[7월 10일]] ~ [[1237년]] [[7월 29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성씨''' ||[[경주 김씨]] → [[전주 김씨]] || || '''휘''' ||연(軟) || || '''부친''' ||부친 [[김약선]][br]모친 [[우봉 최씨]] || || '''배우자''' ||[[원종(고려)|원종]] || || '''작호''' ||경목현비(敬穆賢妃)[br]태자비(太子妃)[br]'''고려왕비(高麗王妃)''' || || '''시호''' ||정순왕후(靜順王后)[br]→ '''순경태후(順敬太后)''' ||}}}}}}}}} || [목차] [clearfix] == 개요 == [[원종(고려)|원종 순효대왕]]의 1비로 [[충렬왕]]의 모후다. 이름은 김연(金軟). == 생애 == 그녀의 아버지는 [[김약선]]으로 생전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이나 조부인 김태서 대에 [[전주 김씨|전주]]를 관향으로 삼으니 본관은 전주로 바뀌었다. 그녀의 어머니 우봉 최씨는 다름아닌 [[최우]]의 장녀. 그러니까 그녀는 [[최우]]의 외손녀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을 고려 황실과 연을 맺어 사돈으로서 입지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혼인으로 원종이 태자였던 시절에 입궐해 경목현비라 불렸다. >부부의 결혼은 천지양의의 상례(天地兩儀之常)이니, 이보다 중요한 상례는 없을 것이다. 제왕의 자손(帝王垂子孫)이 만세의 통치(萬世之統)를 드리우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생략) >---- > - 고종의 주례사로 태자 원종과 태자비 순경태후가 결혼할 때 내린 칙서다.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3권 기록. 고종 22년(서기 1235년)에 정식으로 원종과 혼례를 올려 태자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236년 아들 [[충렬왕]]을 낳고 그 다음 해 [[공주]]를 낳은 뒤 병을 얻어 16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했다.[* 동국이상국집에 기록된 애책문에 따르면 16살에 죽었다고 한다.] 이 때 낳은 [[공주]]도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려서 죽은 듯. 거기다 충렬왕 때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왕실의 피바람이 그나마 덜 불었을 거라는 점에서 매우 안타깝다. [[동국이상국집]] 제 36권에 [[이규보]]가 고종의 명을 받들어 쓴 순경태후의 시책문(諡冊文)과 애책문(哀冊文)이 남아있다. == 시호 == 고려의 시호 전통을 지킨 마지막 왕후다. 고려는 [[위숙왕후]] 이래로 국왕의 대표시호와 왕후의 대표시호를 맞췄다. 예를 들어 威숙왕후와 세조 威무대왕, 원종 順효대왕과 順경태후 같이.[* 이 뿐만 아니라 태후 존호를 시호로 사용하는 것도 고려 고유의 시법이다. 원래 태후는 생전의 칭호로 사후엔 붙히지 않는다. [[태후]] 문서의 고려 항목 참조.] 원종 3년(서기 1262년)에 죽자 그 시호를 ''''정순왕후(靜順王后)''''라고 하면서 추증했다. 훗날 1274년 아들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자 태후에 추존되어 그 시호를 ''''순경태후(順敬太后)''''라 했다. 충렬왕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고려의 전통을 지킨 독자적 시호를 바치고 아버지에게 최후의 묘호 및 시호를 바침으로서 고려의 마지막 '전통적' 태후[* 마지막 태후는 아니다. 고려 마지막 태후는 [[명덕태후]]이며 그외에도 [[제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와 같이 태후 시호가 올려졌던 왕비도 있다.]와 해동천자에게 예우를 바쳤다. [[동문선]] 29권엔 아들 충렬왕이 어머니를 추봉할 때 쓴 옥책문이 남아있다. 근데 여기선 '''숭崇'''경왕태후라고 했다. 충선왕 때 원 무종이 충렬왕의 어머니라고 하여 고려왕비라 추봉했다. == 가릉 == 그녀의 능인 가릉(嘉陵)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해 있는데, [[희종(고려)|희종]]의 석릉와 [[고종(고려)|시아버지]]의 홍릉, 시할머니인 원덕왕후 유씨의 곤릉과 더불어 [[대한민국]] 내에 위치한 몇 안 되는 [[고려왕릉]] 중 하나이다. == 대중매체 == [[MBC]] 사극 [[무신(드라마)|무신]]에서도 잠깐 등장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달아 외조부 최우의 손에 의해 잃자 외조부를 원망하며 시름시름 앓아가다가 갓 태어난 [[충렬왕|왕손]]을 남긴 채 거의 화병으로 죽는 것으로 연출되며 나왔다. 이 때문에 남편 원종은 무신정권에 극도로 반감을 가지게 된다. [[분류:고려의 왕비]][[분류:전주 김씨]][[분류:1222년 출생]][[분류:1237년 사망]][[분류:출산 중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