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711년 출생]][[분류:762년 사망]][[분류:시안시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당 황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ece5b6 '''숙종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돌궐 가한)] ---- ||<-5><#a48252> '''[[당나라|{{{#ece5b6 당}}}]]''' '''[[사도|{{{#ece5b6 사도}}}]]''' || || 이성의 ||←||<#a48252> '''{{{#ece5b6 이형}}}'''[br],,{{{#ece5b6 732 ~ 738}}},, ||→|| 이륭업 || ---- [include(틀:역대 당 황태자)]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8E096, #F4EEB0 20%, #F4EEB0 80%, #E8E096); color: #1e1e1d" '''돌궐 제19대 가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제7대 황제[br]{{{+1 숙종 선황제 | 肅宗 宣皇帝}}}'''}}}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image.wangchao.net.cn/1326556889658.jpg|width=100%]]}}} || ||<|2> '''출생''' ||[[711년]] [[10월 19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동궁 별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즉위''' ||[[756년]] [[8월 12일]] || ||[[당나라|당]] [[닝샤 후이족 자치구|영무성]] 남문성루[br](現 [[닝샤 후이족 자치구]] [[인촨시]] 링우시) || ||<|2> '''사망''' ||[[762년]] [[5월 16일]][* 혹은 음력 5월 16일. 당현종이 붕어한 지 13일만이란 기록을 따른 것이다.] (향년 51세) || ||[[당나라|당]] [[허난성|동도]] [[뤄양시|낙양]] 황궁[br](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건릉]](建陵) || ||<|4>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태자}}}''' || ||[[738년]] [[6월 24일]] ~ [[756년]] [[8월 12일]] || ||'''{{{#ece5b6 제7대 황제}}}'''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4EEB0; font-size: .9em" {{{#1e1e1d,#2d2f34 '''제19대 가한'''}}}}}} || ||[[756년]] [[8월 12일]] ~ [[762년]] [[5월 16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사승(嗣升) → 준(浚) → 여(璵)[br]→ 소(紹) → 형(亨) || || '''부모''' ||부황 [[현종(당)|현종]][br]모후 원헌황후 || || '''형제자매''' ||24남 30녀 중 3남 || || '''배우자''' ||폐후 장씨, 장경황후 오씨 || || '''자녀''' ||14남 9녀 || || '''종교''' ||[[도교]] || || '''작호''' ||섬왕(陝王) → 충왕(忠王) || || '''묘호''' ||'''[[숙종]](肅宗)''' || || '''존호''' ||건원대성광천문무효감황제[br](乾元大聖光天文武孝感皇帝)[* [br] 광천문무대성효감황제(光天文武大聖孝感皇帝)[br]→ 건원대성광천문무효감황제(乾元大聖光天文武孝感皇帝)] || || '''시호'''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br](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 || || '''한호''' ||천가한(天可汗) || || '''연호''' ||[[지덕]](至德, [[756년]] ~ [[758년]])[br][[건원]](乾元, [[758년]] ~ [[760년]])[* n재를 폐기하고 n년으로 회귀했다.][br][[상원(연호)|상원]](上元, [[760년]] ~ [[761년]])[* 761년 9월부터 보응 연호를 선포할 때까지는 상원 연호를 폐기하고 원년만 사용했다.][br]보응(寶應, [[762년]] ~ [[763년]]) || || '''절일''' ||천성지평절(天成地平節)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의 제7대 [[황제]]. 초명은 이여(李與)였고, 개명한 후에는 이형(李亨)이었다. [[현종(당)|현종]] 이융기의 [[아들]]로, 어머니는 원헌황후 양씨였다. 묘호는 [[숙종]]이었으며, 시호는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로 줄여서 선황제(宣皇帝)였다. == 생애 == === 즉위 이전 === 원래는 당현종과 귀빈 양씨(원헌황후) 사이의 3남이어서 제위와는 연관없이 충왕으로 책봉된 황자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으로 인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당시 간신이자 실세였던 [[이임보]]는 오랜 [[태평성대]]('''[[개원지치|개원성세]]''')로 헤이해진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정순황후 무씨|무혜비]][* [[측천무후]]의 조카였다.]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 13남. [[양귀비]]의 남편, 즉 아버지에게 아내를 뺏긴 그 사람이다.]를 황태자로 세운 뒤 자신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공작을 실행했다. 그 결과 드디어 사단이 벌어졌다. 황태자인 이영과 이복형제인 악왕 이요, 광왕 이거 등이 임치 출신의 그들의 어머니들이 현종으로부터 받고 있었던 총애를 무혜비에게 뺏긴 것에 대해 원망하는 것을 무혜비가 전해듣고 현종에게 호소하는 일이 생겼다. 현종이 대신들을 모아놓고 이영을 폐위하겠다고 하자 [[장구령]]이 강하게 반대했다. 대다수의 대신들이 보기에는 이 정도의 일로 황태자를 폐위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이임보도 초기엔 이것에 동의하고 장구령 등과 함께 황제에게 나아가 건의키로 했는데, 막상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이임보는 아무런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친분이 있었던 환관 등에게 >"이것은 폐하의 가정 문제인데 외부인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 말하면서 뒤통수를 쳤다. 그 뒤 이임보는 장구령 등이 붕당을 지어 황제의 권력에 반항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어이 장구령과 배요경의 실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이후 반란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종이 직접 황태자 이영(차남. 조여비 소생), 광왕 이거(7남. 재인 유씨 소생), 악왕 이요(5남. 덕의 황보씨 소생)를 가차없이 죽이도록(737) 유도했지만 무혜비의 자식인 수왕 이모를 황태자를 세우려던 이임보의 기도는 현종의 최측근 환관인 [[고력사]]가 3남인 충왕 이형[* 훗날의 당숙종]을 황태자로[* 이영이 사사되고난뒤 서장자인 1남 경왕 이종(화비 유씨 소생)이 있었으나 신하들중에 지지하는 사람이 없어서 충왕 이형이 사실상 장자취급이었다.] 밀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이임보는 748년에 황태자 이형을 반역죄로 옭아매 갈아치우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황실에서 황태자와 같이 자랐고, 이때에 이르러 군부 최고의 거물로 손꼽히던 [[왕충사]][* 개원 연간 초기 [[토번]]의 침공 때 선봉장으로 나섰다가 아버지가 전사했고, 이를 불쌍히 여긴 당현종이 황실로 데려와 키웠다. 황태자인 충왕 이형과는 불알친구였다...]를 목표로 일단 지정했다. 왕충사가 표적이 된 것은 막강한 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하서와 농우절도사직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이나마도 747년 다른 절도사직을 포기한 결과로, 747년까지 삭방과 하동절도사까지 겸직해 4개의 절도사직을 소유하고 서북방 일대의 군권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한때 지휘 병력만 270,000명에 달해 [[안록산]]은 상대도 안 되는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여기에 중앙 조정에서 어사대부직까지 맡고 있었다. 일단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을 없애려면 큰 죄목이 필요했다. 이임보는 왕충사가 대토번 전선의 요충지인 석보성 공략에 소극적으로 임해 태업했고, 동시에 황태자 이형을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기도했다고 참소했다. 여기서 황태자건은 둘째치고 고작 성 하나를 공략하는 데 태업했다고 참소한 이유는 석보성이 매우 중요한 성이었기 때문이다. 석보성은 청해성 황원현에 위치한 성으로, 측천무후~현종 시기 당과 토번의 우열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존재한 성이었다. 개원시기 장기간 당나라의 소유였으나 토번이 747년 이를 공략하여 점령한 성이었는데, 당현종이 석보성 탈환을 주장하자 왕충사가 이에 반대했다.[* 이 시기에 [[돌궐 제2제국]]이 멸망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참고로 석보성은 훗날 번장인 [[가서한]]이 탈환했는데, 토번군 수백 명이 지키는 성의 탈환에 당군 수만 명의 사상자가 생겨서 '''"왕충사가 옳았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를 빌미삼은 이임보는 자신에게 위협적인 인물로 성장한 왕충사와 자신이 세우지 않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황태자 이형을 한꺼번에 엮어 제거하고자 기도했다. 그러나 군부에서의 반발과[* [[가서한]]이 왕충사의 후임 절도사로 부임하면서 당현종에게 직접 왕충사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당현종의 소극적인 태도[* 황태자 이형을 내세운 쿠데타건은 "황태자가 궁궐 안에만 있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황태자 이형도 환관 고력사 등 자신의 연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중하는 태도를 보여 살아남았다.]에 의해 황태자 퇴출 기도는 실패했고, 왕충사 또한 한양태수로 좌천되는 정도에서 마무리지게 되었다. 또한 호부상서 겸 어사중승인 양신긍이 황제의 호감을 사자 심복이었던 왕홍을 활용해 옥사를 일으켜 제거했다. 그러나 [[양귀비]]의 등장으로 [[양국충]]이 출세하면서 [[이임보]]는 몰락해버렸다. 하지만 양귀비 또한 태자 이형의 지위를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한편으로 양귀비에게 자식이 없다보니 현종의 사후가 두려운 양씨 가문과의 거래로 양귀비의 언니인 한국부인 양씨의 딸 최씨를 태자의 장자인 광평왕 이숙[* 훗날의 [[대종(당)|당대종]]]의 정비로 삼았다.[* 하지만 정작 이 혼사에 불만이 많던 광평왕 이숙은 황제가 된뒤 왕비 최씨를 추존을 하지도,최씨의 아들들을 태자로 지명하지도 않았고 측실인 심씨(훗날의 [[예진황후]],[[당숙종]] 이괄의 생모)를 안사의 난때 행방불명이 된뒤 아들인 서장자 이괄을 황태자로 삼고 황후 자리도 공석으로 해놓을 정도로 총애했다.] 이렇듯 위태로운 황태자 자리였지만 이형은 신흥 실세인 양씨 가문과의 [[정략결혼]], 현종의 최측근인 [[고력사]] 및 친구인 [[왕충사]]와 이필의 지지, 아내인 장씨의 내조, 장남인 광평왕 이숙[* 훗날의 [[대종(당)|당대종]]으로, 장경황후 오씨 소생이었음.]에 대한 현종의 총애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이렇듯 간신 이임보와 무혜비에게 태자 지위를 위협당한 것에 신물이 났던 이형은 영무에서 즉위한 뒤 생모 귀빈 양씨(원헌황후)의 정적이었던 무혜비의 황후로서의 예우를 일절 폐했고 이임보는 사후 모든 관직을 추탈당했다. === 분조의 편성과 즉위 === 이형이 황제로 즉위하게 된 배경은 756년 6월, [[안록산의 난]]으로 현종이 [[쓰촨 성|촉]]으로 피신하면서 [[관중]]에 태자를 남겨놓고 [[분조]]를 세운 것이 시작이었다. 황태자[* 충왕 이형]가 삭방 번진으로 패잔병을 모아 북상하던 중 금군의 추대로 피난지 영무에서 7월 12일에 황제로 즉위했다.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일이었지만 8월 12일에야 이 소식을 들은 현종은 불가피성을 인정하며 선뜻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나 논란을 불식시켰다.[* 그러나 이 때문에 숙종의 정통성은 취약했다. 현종이 장안으로 복귀한 뒤 막후에서 상당한 실권을 행사하면서 현종 지지파와 숙종 지지파로 조정이 쪼개졌고, 결국 현종과 숙종이 모두 병에 시달린 틈을 타서 장 황후와 이보국 등의 숙종의 측근들이 고력사 등 현종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현종의 거처를 흥경궁에서 태극궁으로 옮긴 후 죽을 때까지 감시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숙종의 고난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즉위시킨 신하들을 방위를 위해 이곳 저곳에 배치하고나자 문•무 관원이 30명이 안될 정도로 분조의 규모는 조촐해졌으며 풀밭에서 조정을 세워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해졌다. 사람 손이 워낙에 없다 보니 심지어 아내인 장량제(張良娣)[* 장황후는 일찍이 태자 이형(숙종)의 양제(良娣)로 뽑혔는데, 이 때문에 '장량제'(張良娣)라고도 불린다.]는 영무에서 자식을 낳고 4일 만에 일어나서 병사들의 옷을 꿰멨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장 황후가 아닌 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숙종은 박릉을 포위하고 있었던 [[곽자의]]와 [[이광필]] 그리고 안서 번진, 하서 번진 등에 명령해 병사들을 이끌고 영무에 오도록 했으며[* 하지만 이때문에 박릉의 [[사사명]]이 포위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안진경의 의용병이 괴멸되면서 기어이 하북이 안록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오랜 친구인 명신 이필을 불러들여 그나마 조정의 위엄을 조금씩 세워나갔다. 또한 제오기를 기용하여, <[[소금]][[전매]]법>을 실시해 재정을 보충했다. 이로써 [[안록산]]이 내건 거병의 의의는 퇴색되었고, 곧 안록산이 칭제하면서 민심은 당 조정으로 기울게 되었다. 또한 안록산이 [[낙양]]에만 머물며 [[시안(도시)|장안]]을 비워둔 것도 관중의 민심이 안록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는 결정타가 되었다. === 반격과 양경(장안과 낙양) 회복 ===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즉위한 756년 하반기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하북이 넘어감은 물론 숙종이 직접 뽑은 장안 수복군 대장 방관의 삽질과 동생인 영왕 이린(현종의 12남. 순의 곽씨 소생)의 [[강남(중국)|강남]] 독립 움직임으로 상황이 불리해진 것이다. 그러나 명장 곽자의와 이광필의 활약 및 이필의 책략, 튀르크계 [[복골|복고부]] 출신의 번장 [[복고회은]]을 통한 [[위구르 제국]](회흘)의 지원으로 상황은 점점 숙종에게 유리해졌다.[* 숙종이 장안 수복시 약탈도 허용한다는 식으로 직접 위구르에게 청한 것이었다.(약탈은 광평왕, 즉 당대종이 막아냈다.) 숙종은 숙적인 [[토번]]에게도 '''[[조공]]하여'''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는 시의적절했으나 주변 국가에게 대당제국의 약체화를 광고하는 꼴이 되기도 했다.] 757년 [[안록산]]이 아들인 [[안경서]]에게 살해된 뒤 [[이광필]]은 당왕조의 근원지인 북도 [[태원]]을 지켜내고 채희덕을 박살냈으며, 장안 근교의 봉상(鳳翔)으로 행재소(임시 수도)를 옮긴 숙종은 그해 10월 양경(장안과 낙양)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숙종은 봉상을 떠나 10월 27일 장안에 입성했고, 757년 12월, 근 1년 반 만에 숙종과 태상황 현종은 장안에 귀환했다. 하지만 돌아온 현종이 숙종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숙종의 권력은 삐걱거렸고, [[사사명]]의 투항이 반란의 종결을 의미하는 줄 착각한 것이 [[사사명의 난]]으로 이어지는 큰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숙종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후회되는 최악의 실수를 하고 말았다.''' 숙종에게는 셋째 황자인 건녕왕(建寧王) [[이담(당)|이담]](李倓)[* 궁인(宮人) 장씨(張氏)의 소생.]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평소에 효심이 깊은 효자였다. [[안록산의 난]] 당시 영무까지 도망갈 때 반군에게 습격받은 아버지 숙종을 지키기 위해 병사들과 함께 직접 반군과 싸워 아버지를 끝까지 지킨 공을 세운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건녕왕 이담의 능력과 품성, 군공 때문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여겼는데, 이런 상황속에서 타이밍 딱 맞게 환관 이보국과 장황후가 건녕왕을 모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담은 억울하다고 주장했지만 숙종은 후처와 측근의 참소만 믿고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은채 대뜸 건녕왕을 죽여버렸다. 황태자 이숙[* 훗날의 [[대종(당)|당대종]] 이예(李豫)]과는 [[이복형제]]이긴 하지만 사이가 좋은 형제였는데, 동생 이담의 억울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숙은 아버지 숙종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숙종의 친구이자 재상인 이필도 건녕왕 이담의 처형에 경악하며 숙종을 비판했다. 후에 이필이 이담의 무고를 밝혀내 숙종은 후회했으나 엎질러진 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 대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붕어하다 === 758년 정월, 숙종은 연호를 건원(乾元)으로 바꾸고, 2월에 천보 3년 이후 '년'(年)을 '재'(載)로 세던 것을 다시 '년'으로 회복시켰다. 이렇게 758년은 건원 원년이 되었다. 하지만 범양절도사로 봉해졌던 사사명을 팽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들통나면서[* 이때 사사명은 이광필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숙종이 그걸 들어줄 리 없었다.] 사사명이 범양에서 재봉기하게 되었고, [[업]]의 안경서가 구원되었으며, 그걸 막으려던 600,000명의 당군이 지휘관 부재로 130,000명의 사사명군에게 [[사사명의 난#s-3.1.1|안양하 전투]]에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에 숙종은 (모함 등의 이유도 있지만) 곽자의를 원수에서 물리고 [[삭방절도사]] 겸 병마원수에 이광필을 임명했다. 한편 사사명은 759년 3월, 사용 가치가 끝난 패륜아 안경서를 참살하고 스스로 연나라의 제3대 황제를 자칭하며, 이미 죽은 안록산을 태상황으로 추존했다. 하지만 761년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가 사사명을 죽이고 제4대 황제에 올랐다. 이런 와중에도 당나라는 손을 놓고 있었는데, 이는 군권을 장악한 환관 이보국과 장황후 등에 의해 조정이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이보국은 760년 현종의 남아있는 영향력을 두려워하던 숙종 주위의 분위기를 이용해 흥경궁의 현종을 감로전에 유폐시키고, [[고력사]] 등을 귀양시켰으며, [[안진경]]을 좌천시켰다. 숙종이 현종의 유폐를 반대했으나 이미 막을 수 없었고, 현종에 대한 알현마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숙종은 병이 났고, 점점 깊어만 갔다. 762년 5월 3일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종이 감로전에서 붕어했다. 이 상황속에서 이보국과 손을 잡고 있었던 장황후가 환관 단항준, 숙종의 둘째(차남) 황자인 월왕 이계(越王 李係)[* 궁인(宮人) 손씨(孫氏)의 소생.][*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장황후는 월왕 이계에게 "자신과 손을 잡으면 황제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제안을 했으며 월왕은 그 제안을 수락했다.]와 공모해 5월 16일, 이보국과 태자 이예를 함께 죽이려고 했으나, 이들의 음모는 이보국에게 발각되어 유폐되었다.('''보응정변''') 이 충격으로 숙종 역시 5월 18일에 붕어하고[* 숙종이 독살당했다는 가설이 있다.] 5월 20일 태자인 이예가 즉위하니 그가 [[당대종]]이었다. 한편 환관 이보국은 대종의 즉위 과정에서 장황후와 월왕 이계, 연왕 이한(兗王 李僴)[* 숙종이 태자 시절에 이혼한 폐태자비 위씨의 아들이었다. 숙종에게는 6남이었다.]을 참살해 위협을 제거하고, 당숙종은 물론 당대종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세도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으나, 손을 잡았던 환관 정원진에 의해 1개월 만에 실각하고 몇 달 뒤 암살당했다. 하지만 이보국은 '''환관에 의해 황제가 옹립되는''' 최초의 기록을 세우면서 앞으로의 환관 세도, 즉 중국 역사상의 '''제2차 환관시대'''를 예고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평가 == 중국사에 박학하지 않은 사람은 [[현종(당)|아버지]]가 일으킨 [[안사의 난|실책]]을 수습하기 위해 고생한 사람 정도로만 알기 쉬우나, 현실은 수습은커녕 아버지와 같이 '''중당의 혼란을 야기한 [[암군]]'''일 뿐이다. 늙은 현종이 제국을 망쳐놓은 상황에서 분조를 조직하고 당 황실을 살려낸 공로는 있었으나 숙종은 아버지처럼 용인에서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친구이자 유능한 신하인 이필을 중용한 것은 분명 잘한 것이었으나, 섣부른 장안 공격의 책임자를 방관으로 한 것, 범양 공격을 막고 양경(낙양-장안)의 수복에 집착한 것[* 범양 공격과 양경 탈환은 일장일단이 있어 어느 쪽을 택하지 않았다고 잘못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숙종의 입장으로서는 당장 양경을 회복하고 조정의 권위도 회복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숙종이 거기서 반란이 끝났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양경을 회복할 수는 있겠으나 반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필의 간언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반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 끝난 것처럼 뒷처리에 들어갔다가 사사명의 난으로 반란이 더욱 커져버린 것 등 실수가 많았다. 이필을 뽑아놓고는 정작 그의 조언을 제대로 듣지 않고 상당 부분 뒤집은 셈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앞서 말했듯 재위 후반에는 환관 이보국과 후처인 장황후에 휘둘렸고, 특히 숙종 본인도 아버지 현종 만큼 [[막장부모]]였는데 장자인 광평왕 이숙(廣平王 李俶)[* 훗날의 [[당대종]] 이예(李豫)]을 원수로 삼을 때를 전후로 이전에 군공을 세운 것 때문에 후계자 다툼을 할지 모른다고 여긴 3남 건녕왕(建寧王) [[이담(당)|이담]](李倓)을 이보국과 장황후의 참소만 듣고 기어이 죽여버렸다. 그런데 정작 이담은 이복형 이숙과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 거기다 이담은 분조가 영무까지 도망갈 때 반군에게 습격받은 아버지 숙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창(무기)|창]]을 들고 병사들과 함께 직접 반군과 싸워 상처까지 입어가면서도 피난 행렬을 지킨 효자였다. 특히 숙종이 피난 중에 식량이 부족하여 열악한 식사를 하고 고생하자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드리지 못한다고 눈물을 흘려 신하들과 병사들 전원이 이담의 효심을 칭찬할 정도였다. 이런 효자를 숙종은 후계자 다툼할지 모른다며 후처와 측근이 하는 참소를 검토하지도 않고 대뜸 죽여버린 건 정말이지... 이건 [[현종(당)|현종]]보다 더하다. 당현종도 무혜비와 이임보의 참소를 듣고 자식들 세 명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지만 최소한 쿠데타 의혹이 터진 다음에야 자식들을 사사했다. 정작 황태자 이숙은 우애가 있었던 이복동생 이담의 억울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는 아버지 숙종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숙종의 친구였던 이필도 건녕왕 이담의 처형에 경악하며 후에 숙종에게 이때 일을 가지고 지나쳤다며 비판했고, 손자인 [[덕종(당)|덕종]]과 이야기하면서 두고두고 깠다. 우습게도 자식인 이담을 죽인 숙종 역시 피해자인데 유년 시절 형 이영과 동생 이요 및 이거가 기어이 아버지 현종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고, 동생인 수왕 이모가 부인인 [[양귀비]]를 현종에게 빼앗기는 광경을 보는 등 숙종 역시 아버지인 현종에 의해 형제들을 많이 잃어버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인물이었는데 본인이 현종이 했던 실수를 반복한 것이었다. 즉 '''[[가해자가 된 피해자]]였다.''' 또한 [[사사명]]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도록 빌미를 제공하고, 안양하 대전에서 60만 대군의 참패를 빚은 것도 '''총지휘관을 일부러 선임하지 않은''' 숙종의 탓이었다. 특히 이때 관군용사였던 환관 어조은이 처벌을 받지 않아 대종 치세때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이씨 황실에 충성하며 반란 진압에 나선 절도사에 대한 대접이 소홀했으니 절도사들이 반발하며 등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내지 절도사들은 당 황실에 충성을 바쳤으나 정작 숙종은 그들에게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으면서 반군을 진압하라는 명령만 내렸다. 이 때문에 자력으로 싸워야 했던 내지 절도사들은 조정의 지원도 없는데 반군과 싸워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면 그들 입장에선 큰 손해였기에 반군과의 전쟁을 기피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경을 지키는 병력들을 내란 진압에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이민족 세력인 위구르와 토번까지 끌여들여,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결국 당나라 중기의(이후 말기까지의) 거의 모든 문제[* [[절도사]], [[위구르 제국|위구르]]와 [[토번]], [[환관]], [[외척]]]들이 숙종의 손을 거치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용두사미]]격의 [[혼군]]이었다. 현종 말년이 하도 막장 이미지라 그렇지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도리어 키워놓은 것은 숙종의 책임이 컸다. 물론 숙종도 최악의 막장 상황임을 알고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으며, 건강이 나빠져 오래 재위하지 못한 탓도 없지는 않지만 본인의 잘못된 판단과 아집으로 인해 사태를 악화시킨 터라 책임이 크다. [[임진왜란|전란]]으로 도망치면서 [[선조(조선)|아버지]]의 뜻에 따라 [[분조]]를 운영했으나, 아버지의 위세에 눌려있었고, 말년에 국사를 망치며 궁중과 권신들에게 휘둘렸다는 점은 [[조선]]의 [[광해군]]과 흡사한 면이 있다. 다만 당숙종과 달리 광해군은 아예 폐위되었고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었다. == 기타 == * [[한국사]]와 관련해서 가장 큰 떡밥은 그가 [[고려]]를 세운 [[태조(고려)|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의 아버지라는 이야기이다. 고려의 전설을 바탕으로 기록한 《본국편년강목》, 《편년통록》, 《[[제왕운기]]》 등에는 그를 왕건의 증조부라고 기록했지만 이는 말이 안 된다. 숙종은 [[안사의 난]] 이전엔 [[시안(도시)|장안]]을 벗어난 적도 없었고 재위 기간도 짧았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미증유의 대란을 수습하느라 중국은 커녕 중국 서부의 [[관중]]을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바다 건너 [[신라]]까지 가서 자식을 낳았을 리가 없다. 왕건의 증조부가 당숙종이라는 이야기는 일개 지방 [[호족]] 출신으로 한 나라를 창건한 왕건의 집안이 듣보잡이 아니라 세계 제국이었던 당나라 농서 이씨 황실의 후예임을 내세워 왕권을 높이고자 만들어낸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게 신빙성이 낮다는 걸 고려의 신하들이 눈치챈다 하더라도 섬기는 주군의 위신과 관련된 것이라 감히 의심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실드]]쳐 줄 수밖에 없었다. [[왕륭]]의 초명이 용건이고, 이때까지 성씨도 제대로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고려 왕실의 성이 왕씨인 것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의 한림학사가 왕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가 듣기로 대왕의 조상은 당나라의 숙종 황제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어디에서 근거한 말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대궐 밖에 나간 일이 없고 안록산의 난이 있었던 때는 영무[* 지금의 중국 서북부 [[간쑤성]]과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사이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속한 도시. 한족의 전통적인 영역으로 따지면 중국 서쪽 끄트머리다. 즉 중국을 가운데 두고 한반도와 완전 반대 방향 수천리 건너편이다.]에서 즉위했으니, 어느 틈에 조선[* 아직 [[태조(조선)|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이므로 [[고조선]]이 있었던 [[한반도]] 일대. 전근대에는 한중일 모두 서로 실제 국호와는 다르게 부르기도 해서 조선은 명나라 사람을 당인이라 하기도 했고 스스로를 청구, 계림이라 하기도 했으며 일본을 왜라고 부르기도 했다. 반대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이란 국호 외에 고려나 신라라는 명칭도 통용되었으며 일본의 경우 조선인을 당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에 가서 자식을 둘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충선왕이 대답을 못하자 옆에 있었던 민지(閔漬)[* 《본국편년강목》의 저자.]가 대신 대답하기를 “그것은 우리 국사에 잘못 쓰인 것입니다. 사실은 당숙종이 아니고 [[선종(당)|당선종]]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한 일화가 있다.[* 810년에 태어난 당선종을 택하면 적어도 생몰년은 대강 들어맞고, 증손격인 태조 왕건도 877년 생이니 대충 연도가 들어맞는다. 또한 선종은 젊었을 때 제위와 거리가 멀어서 자유롭게 살다가 무종이 독살되자 예기치 않게 즉위했으니 그 기록이 남지 않은 자유롭던 시절에 신라 땅까지 돌아다녔을 수도 있겠다는 최소한의 신빙성(?)은 생긴다.] 원나라의 한림학사 역시 민지의 대답을 듣고, “선종은 어렸을 때 오랫동안 떠돌아다니면서 고생 좀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하고 납득했다. 고려 말의 학자 [[이제현]]은 《왕대종족기》[* 고려시대에 편찬된 역사서. 현재 전하지 않으며 《고려사》 등에 이 책의 내용을 인용했다.]를 언급하며 당숙종이 증조부가 아니라 고조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증손자라기엔 연도가 좀 안 맞는다는 [[설정오류]]를 고쳐보려는 시도였다.[* 일각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에 대한 계승의지를 가진 고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침략한 당나라 황제의 후손을 자칭함을 두고 반감을 품기도 한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공격한 건 당숙종이 아니라 그의 증조부인 당고종이고, 당숙종쯤 되면 신라는 물론이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의 적대관계도 어느 정도 누그러진 상태였다. 일본도 [[진무 덴노]]의 형이 신라 왕실의 조상이라고 설명했고, [[태종(당)|당태종]]도 자신의 조상을 [[노자]]라고 주장했으며, [[금나라]]도 [[태조(금)|태조 완안아골타]]의 조상이 고려 혹은 신라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등, 왕실 조상의 출신을 타민족과 연계하는 것은 당시 국가들에서 흔한 일이었다. 어차피 왕건의 증조부가 당나라 출신이라고 해도 왕건의 출신지는 고구려계 유민들이 많았던 지역이었고, 왕건 대쯤 되면 당나라보다는 고구려 혈통이나 정체성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고구려계 당나라 귀족이[* 당나라는 번장 제도 등을 통해 이민족들을 수용하는 융화정책을 폈다. [[고사계]]나 [[고선지]] 부자, [[왕사례]] 등등이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귀족들이었다.] 와전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왕건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며 고려 역사를 중국에 귀속된 역사로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속설이 사실이라고 쳐도 왕건의 중국 혈통은 전체의 1/16도 되지 않고 국가 정체성도 당나라 계승이 아니라 고구려 계승으로 정하였으며 국성도 이씨가 아니라 왕씨였다. == 대중매체에서 == 명군도 아니고 재위기간도 짧아서 대우가 별로인 황제이다. 다만 아들과 손자가 명군이어서 황제로서는 별로지만 아버지로서는 괜찮은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보통 주연급으로 등장하는 아들 대종의 정적인 장황후와 환관 이보국에게 휘둘리는 것도 나와서 아들인 대종에게 고구마를 먹이는 무능한 아버지로서의 면모도 있다. * 2017년에 방영된 중국 드라마 <대당영요>에서는 아들이 주인공이라 비중이 적다. 능력은 부족한데 안록산의 난을 처리한다고 고생하는 모습들이 나온다. * 2010년에 방영된 중국 드라마 <양귀비비사>에서는 형제들 중에 능력이 부족하고 권력에 대한 야심도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총명하고 곧은 성품을 지닌 아들(대종)을 두고 있어서 현종이 손자를 보러 가끔 숙종의 집에 들른다. == 둘러보기 == [include(틀:구당서)] ---- [include(틀:신당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