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별궁과 궁가)] ---- ||<-3> {{{-1 {{{#ffd700 '''조선의 별궁'''}}}}}}[br]{{{+1 {{{#ffd700 '''수진궁'''}}}}}}'''[br]'''{{{#ffd700 '''壽進宮'''}}}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서울 종로구 삼봉로 43, 너비=100%, 높이=100%)]}}} || ||<-2> '''위치''' || [[한성부]] 중부 수진방[br]{{{-1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봉로 43)}}} || ||<-2> '''설립시기''' || 1483년 || ||<-2> '''해체시기''' || 1909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7-10-10 19-30-56.jpg|width=100%]]}}} || || {{{#gold '''현재 수진궁 터 자리. 종로구청과 그 주변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별궁이다. 지금의 [[종로구청]] 일대에 있었으며 이 자리는 건국 초 [[정도전]]이 살던 집터의 일부이기도 하다. 유래 자체는 조선 [[세종(조선)|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이 사망하자 영장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壽進宮)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수진동의 유래다.] 나중에 원래 [[예종(조선)|예종]]의 둘째아들이자 평원대군의 봉사손 [[제안대군]]의 집을 [[사당]]으로 사용하면서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왕자녀들과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12세 이하의 어린 공주ㆍ옹주들의 제사를 합동으로 모시는 곳으로 바뀌었다. 1544년([[중종(조선)|중종]] 39년)에 고쳐 지었고 [[인조]] 이후로는 후사가 없는 왕자의 집안 재산과 대비전의 사적인 돈을 조달하고 관리하는 곳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숙종(조선)|숙종]] 연간에는 [[현종(조선)|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명으로 공식적으로 완전한 제사궁이 되었다. 훗날 [[정조(조선)|정조]]는 비빈과 [[대군]]들의 [[묘]]와 [[사당]]에서 제사를 자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다면서 묘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향을 거행하도록 하고, 수진궁에서는 [[한식]]에 행하도록 하면서 이 외에 것은 모두 없애도록 명하였다. 묘소는 총 20위이다. 평원대군, 강령부부인, 제안대군, 상산부부인, [[영창대군]], [[명선공주]], [[명혜공주]] 등 이상 7위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에 있었고, [[용성대군]], [[의창군(동음이의어)|의창군]], 양천군부인 등 이상 3위의 묘소는 풍양(豐壤)에 있었다. [[낙선군]]과 동원군부인의 묘소는 [[청송군]]에, 숙신공주의 묘소는 [[서산시]]에, 귀인김씨의 묘소는 망우리에 그리고 [[소의 유씨]]의 묘소는 은평 진관에 있었다. 정보가 전혀 없는 한 '대군 아기씨'의 묘소는 광주에, 숙의 나씨의 묘소는 서산에, 숙원 장씨의 묘소는 연서에, [[명빈 김씨]]의 묘소는 아차산에, 그리고 [[경빈 이씨]]의 묘소는 풍양에 있었다. 이상은 매년 한식에 제사를 지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e12b935d9855.jpg|width=100%]]}}} || || {{{#gold '''수진측량학교 터 비석'''}}} || [[대한제국]] 시기에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유길준]]에게 찬조금과 함께 [[흥사단]] 사무실로 쓰게 했으며, [[순종(대한제국)|순종]] 때는 이 곳에서 측량술을 가르치던 사립교육기관인 수진측량학교를 개교하였다. 1909년([[융희]] 3년)에 폐궁되었다. 폐궁 후 1년은 궁으로서의 모습이 엄연히 존재하였지만 1년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며 망국이 되자 [[훼철]]되어 일본인들에게 팔려나갔다. == 여담 == * [[광해군]] 10(1618)년 4월에 수진궁에 도둑이 든 적이 있다. 수진궁에 도적이 들어 물건이 없어지자 광해군이 도적으로 유력한 자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유력한 용의자인 김언추라는 사람이 잡혔는데, 그는 끝까지 무죄라고 주장했다. 이 일로 포도대장과 종사관 등은 심한 문책을 당했고, 역시 분노한 포도청에서는 도성 전 지역을 샅샅히 뒤져 죄를 입증할 증거나 다른 공범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김언추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어쨌든 왕실의 궁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죄목이 있으니 (또는 억울하게 뒤집어썼으니) 사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 이 궁에서 수진동이란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수동' 혹은 '수진방굴', '수진방골', '수진박골'이라고도 불렸다. 수진동은 이후 수송동과 청진동 일부로 나뉘었는데, '수송동'의 '수'가 '수진동'의 '수'에서 이어져 오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흐릿하게나마 수진궁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분류:조선의 별궁과 궁가]][[분류:조선 시대의 없어진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