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고대 이집트 관련 문서)] [[파일:수에즈 이집트 3.jpg]] [목차] == 개요 == * [[아랍어]]: {{{+1 السويس }}} * [[영어]]: Suez [[이집트]] 동북부의 [[항구도시]]. [[수에즈 운하]]의 유래며, [[운하]]가 [[홍해]]와 만나는 남단에 위치해 있다. [[카이로]]에서 동쪽으로 120km, 운하의 북단인 [[포트사이드]]에서 남쪽으로 14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78만명으로, 카이로-[[이스칸다리야]]-[[기자]]에 이어 이집트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포트사이드보다 조금 더 큰 도시인데도 --[[유럽]]이 아닌 [[아시아]] 방면이기에-- 포트사이드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진다. 이집트에서 가장 큰 [[석유화학]] 산업 단지가 위치해 있으며, 수입된 [[석유]]를 정재하여 카이로 등지로 보낸다. 도시 [[깃발]]에서도 산업 도시라는 점이 피력되어 있다. [[교육]] 시설로는 수에즈 [[대학]]이 있고, [[항구]]는 포트사이드보다 거대하다. 포트사이드와 달리 [[공항]]이 없는데, [[2019년]] 서쪽 70km 지점에 이집트의 새 행정수도 (NAC)의 [[국제공항]]이 완공되었기에 그곳을 주로 이용한다. 북쪽으로 비슷한 거리에 [[이스마일리아]]에도 [[공항]]이 있지만 [[국내선]]만 있다. == 역사 == [[그리스어]] Κλῦσμα (파도) [[콥트어]] ⲡⲉⲕⲗⲟⲩⲥⲙⲁ [[아랍어]] {{{+1 القلزم }}} [[현대]] 시가지 북쪽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에 건설되고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가 재건한 [[고대]] 도시 클리스마 (알 쿨줌)이 원형이다. 근현대 이전의 해안선은 현재보다 북쪽에 형성되어 있었기에 클리스마 역시 항구 도시였다. 대략적으로 현 시가지 중북부의 [[무슬림]] [[묘지]] 즈음으로 추정된다. [[525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곳을 통해 [[기독교]] [[악숨 왕국]]의 유대 [[힘야르 왕국]] 원정을 돕기 위해 20여척의 함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541년]] [[지중해]]를 뒤흔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역시 클리스마를 통해 확산되었다. 그외에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으로 도시에는 성 아나타나시오스 [[성당]]이 세워졌다. [[이슬람 정복]] 후 클리스마는 [[아랍어]] 지명인 알 쿨줌으로 불리게 되었다. 동시에 [[홍해]]는 바흐르 알 쿨줌 (쿨줌의 [[바다]])으로 명명되었는데, 당시 도시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클리스마와 쿨줌은 [[다리우스 1세]]가 건설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중건한 '[[파라오]] 운하'의 시종착점으로 번영하였다. 그러던 [[770년]] 압바스 [[칼리파]] [[알 만수르]]가 반란 진압 과정에서 운하를 폐쇄해버렸다. [[780년]] 후계자인 [[알 마하디]]가 운하를 일부 복구했지만, [[9세기]] 들어 [[압바스 왕조]]가 쇠퇴하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도시는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잇는 대상 교역을 통해 번영을 이어갔다. 그러던 [[971년]] [[극단주의]] 세력 [[카르마트]]의 장군 하산 알 아삼이 도시를 점령하였는데, 그해 말엽 카이로 전투에서 [[파티마 왕조]]의 자우하르에게 패하고 [[후퇴]]하였다. 이때부터 쿨줌 인근의 샘에 위성도시 수에즈가 건설되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은 [[12세기]] 말엽 홍해 연안을 습격한 [[십자군]] 영주 [[르노 드 샤티용]]에 맞서기 위해 쿨줌과 수에즈를 요새화하였다. 한편 [[13세기]] [[십자군]] 침공과 아이유브-[[맘루크 왕조]]의 내분을 틈타 중앙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베두인]]들이 약탈하며 쿨줌은 [[폐허]]가 되었고, 수에즈 만이 작은 도시로 유지되었다. [[맘루크]] 시기에 일대는 현 [[요르단]] 일대에 기반한 알 카라크 주에 편성되었기에, 맘루크 정부가 이곳부터 아시아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 들어 [[포르투갈]]이 [[인도양]]과 홍해에 진출하자 최후의 맘루크 [[술탄]] 깐수 알 구리는 셀만 레이스에게 6천 병력을 주어 수에즈를 방어하게 하였다. ([[1507년]]) === [[포르투갈]]의 침공 ([[1541년]]) === ||[[파일:하이르 앗 딘 오스만.jpg|width=300]]||[[파일:수에즈 이집트.jpg|width=356]]|| || 인도양의 오스만 해군 || 수에즈 만에 진입한 포르투갈 [[아르마다]] || 이렇게 맘루크 병력이 분산되며 10여년 후 [[오스만 제국]]군은 더욱 수월히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었다. 인도양의 [[패권]] 확립에 나선 오스만 조는 수에즈를 [[해군]]과 [[무역]] 거점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수에즈는 [[포르투갈]]과 싸우기 위해 [[함대]]가 건조되고 출정하는 주요 해군 기지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포르투갈은 [[1538년]] [[디우]] 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1541년]] [[바스쿠 다 가마]]의 아들 에스타벙 다 가마 휘하 40척의 함대를 홍해로 파견하였다. 다만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포르투갈 함대는 [[마사와]]에 반이 머물고 남은 20척만이 당초 목표이던 수에즈로 향하였다. 그마저도 [[수아킨]] 습격 후 4척이 이탈하였고, 250명의 병력을 실은 잔여 16척의 함대만이 [[시나이 반도]]의 [[엘토르]]를 습격한 후 [[4월]] 말엽 수에즈 만에 진입하였다. 그러나 이미 소식을 접한 오스만령 이집트 [[총독]] 다부드 파샤가 해안에 [[포대]]를 설치하고 2천 시파히 [[기병]]을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잠깐의 교전 후 포르투갈 함대는 후퇴하였다. 한편 마사와에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아]]로 돌아가는 길에는 [[폭풍]]으로 여러 전함을 상실하는 등 포르투갈의 수에즈 원정은 대실패로 귀결되었다. === [[근대]] ~ [[현대]] === [[파일:수에즈 이집트 1.jpg|width=800]] [[1832년]], 운하 건설 이전의 수에즈 [[18세기]] 무렵 수에즈에서는 [[히자즈]]의 [[제다]]로 향하는 20척의 함대가 매년 출항하였다. 이는 무역과 성지 순례객 운송의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후 [[1800년]] [[영국]]과 [[프랑스군]]이 격돌하며 도시 대부분이 폐허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쇠퇴한 수에즈는 반세기 후 도시의 이름을 딴 수에즈 운하가 개통하며 다시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다만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지중해]]와 접한 [[포트사이드]]에 정착했기에 수에즈는 비교적 각광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구한 역사성에도 수에즈가 포트사이드에 비해 인지도가 낮다. [[20세기]] 들어 항구 도시로 개발된 수에즈는 포트사이드와 마찬가지로 [[1967년]] [[6일 전쟁]] 후 [[주민]]들이 소개되었다가 [[1975년]] 재건되었다. 21세기 들어 [[아랍의 봄]] 당시에 수에즈는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에 대한 첫 시위가 벌어진 [[대도시]]였다. 따라서 이집트의 시디 부지드라는 별명이 있다. 2021년에는 [[수에즈 운하 에버 기븐호 좌초 사고]]가 수에즈 북쪽 5km 지점의 운하에서 발생하여 많은 선박들이 대신 수에즈 항구에 머물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다. == 갤러리 == [[파일:수에즈 이집트 2.jpg|width=700]] 도시와 운하 [[위성]] [[사진]] [[파일:이집트 항구.jpg|width=700]] [[모스크]]와 운하 [[분류:이집트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