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중국의 역사)] [include(틀:수나라와 당나라 관련 문서)] || [[수나라|{{{#ece5b6 {{{+1 '''수(隋)'''}}}}}}]] || [[당나라|{{{#ece5b6 {{{+1 '''당(唐)'''}}}}}}]] || || '''[[581년|{{{#ece5b6 581.}}}]] [[3월 4일|{{{#ece5b6 3. 4.}}}]] ~ [[618년|{{{#ece5b6 618.}}}]] [[6월 17일|{{{#ece5b6 6. 17.}}}]][br](37년 3개월 14일)''' || '''[[618년|{{{#ece5b6 618.}}}]] [[6월 18일|{{{#ece5b6 6. 18.}}}]] ~ [[907년|{{{#ece5b6 907.}}}]] [[5월 12일|{{{#ece5b6 5. 12.}}}]][br](288년 10개월 25일)'''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c4b3b, #a48252)" '''총 326년 2개월 9일'''}}} || {{{+1 隋唐時代(隋唐时代)}}} [목차] == 개요 == [[수나라]]와 [[당나라]] 두 시대를 합쳐서 부르는 말. [[581년]] [[3월 4일]] 수가 건국된 시점부터 [[907년]] [[5월 12일]] 당이 멸망하기까지 총 '''326년 2개월 8일'''의 기간을 말한다. 중간에 잠깐 당나라가 멸망하고 [[측천무후]]가 [[무주(당나라)|무주]](武周)를 세운 적이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수, 당, 무주의 세 왕조를 포함하는 시대지만, 측천무후가 퇴위하면서 다시 당나라가 복구되어 대개 무주를 당조에 포함시키므로, 두 개의 왕조시대로 본다. [[문제(수)|수 문제]]부터 [[애종(당)|당 애종]]까지 24명의 황제가 다스렸다. == 상세 == [[후한]] 이후 약 400년 간 오랜 분열이 이어지던 [[위진남북조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면서 수당시대는 시작되었다. [[중국사]]에서는 이 시대부터를 [[중세]]의 시작이라 보고 있다. 그러나 수나라는 만 37년 만에 망하고 [[수당교체기|잠시간 분열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당나라]]가 다시 통일을 하며 통일왕조 시대는 이어지게 되었다. 수나라가 워낙 단명한 탓에 보통은 수나라를 하나의 시대로 보지 않고, 중국사에서 비교적 장수한 왕조인 당나라와 함께 묶어서 수당시대라고 한다. 또, [[고조(당)|당 고조]]가 [[공제(수)|수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거의 정권을 인수하다시피 하였고, 수나라의 제도나 행정구역 등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므로 두 나라가 이질적인 다른 시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 수나라가 재통일한 중국은 당나라가 망하고 다시 [[오대십국시대]]로 갈갈이 찢어지게 됨에 따라 통일왕조를 유지했던 기간으로서의 한 시대로 보는 것이다. [[수나라]]와 [[당나라]]를 건국한 세력은 본래 한 세력이다. 수당을 [[한족]] 국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건국 세력 자체는 [[선비족]] 출신인 [[관롱집단]]이다. 이 집단은 마찬가지로 선비족 출신 왕조였던 [[북주]]에서 세력을 키웠다. 수나라 황실과 당나라 황실은 인척관계로 얽혀 있다. [[문제(수)|수 문제]]의 황후였던 [[문헌황후]]는 [[고조(당)|당 고조]]의 이모가 되며, [[양제(수)|수 양제]]와는 사촌지간이 된다. 수도는 계속해서 수당시대 동안 계속해서 [[장안]](長安, 지금의 [[산시성(섬서성)|산시성(陝西省)]] [[시안시]]였다. == 역사 == == 특징 == 이 시대는 [[중국]]이 전성기 중에서도 가장 부강했던 시기로 평가 받는다. 안으로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밖으로는 패권을 확장하려는 시도 끝에 [[고구려]]와 [[돌궐]], [[티베트]] 등의 접경국을 멸망시키고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이전까지는 느슨한 조공관계였던 것이 이 무렵부터 확실한 조공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수당시대에 확립된 제도, 법, 행정구역은 [[중세]] 이후 중국 뿐만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거의 [[근대]]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수나라]] 대에 만들어진 [[대운하]]는 현재까지도 사용 중이고, 당나라 때 만들어진 [[부(행정구역)|부(府)]]나 [[도(행정구역)|도(道)]]는 동아시아의 행정구역 단위로 남아 있다가, 중국에서는 사라지고 현재 [[한국]]과 [[일본]]에 남아 있다. 이 당시에 만들어진 [[장안성]]은 여러 동아시아 도시들의 모태가 되어 [[상경용천부]]나 [[헤이안쿄]]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 외국에 끼친 영향 == 중국을 재통일한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는 눈을 중국 밖으로 돌려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려고 했다. === 한국 === [[한국사]]에서 [[중국]]의 개입이 가장 많았던 시대가 바로 이 시대이다. [[고구려-수 전쟁|수나라는 무려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끝내 정복에 실패했고, [[고구려-당 전쟁|당나라는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했다.]]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했다. 이 시기에 한국과 중국의 교류가 활발했다. 중국에서 문물을 전파하러 한국에 오기도 했고, [[최치원]] 같은 인물들은 중국의 문물을 배우러 유학을 다녀왔다. 중국에서 동래했다고 하는 성씨의 경우, 대부분이 이 시대에 한국에 유입된 것이다. 신라에서는 당시 당나라의 관복을 들여 왔고, 이것이 바로 [[사모]]와 [[단령]]이다. 이것은 [[구한말]]까지 100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문무왕]] 대에는 당나라가 신라 [[서라벌]]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으로 임명하면서 본격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나라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이 쌓일대로 쌓였는데, 이 계림대도독부 설치로 인해 그 감정이 폭발하며 [[나당전쟁]]이 일어난다. 나당전쟁에서 결국 당나라가 패배하고 물러가며 이후 한동안은 중국의 한반도 개입이 없었다. === 일본 === 수당시대는 당시의 [[일본]]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6~7세기 [[아스카 시대]]의 일본에서는 불교를 비롯한 중국적인 것을 받아들이자는 세력과, 토착적인 요소를 유지하자는 세력이 충돌했고, 결국 중국화를 주장한 세력이 승리했다. [[8세기]]의 [[나라 시대]] 동안 일본은 당나라를 닮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수도인 헤이조쿄(나라)부터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모방한 도시였으며, [[헤이안 시대]] 이후 중국과의 관계가 줄어들었지만 일본 문화에서의 당나라의 색채는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일본의 건축물 양식은 당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 이슬람 문화권 === [[태종(당)|당태종]]과 [[고종(당)|당고종]]의 치세 동안 [[돌궐]] 세력을 무너뜨리고 [[안서도호부]] 등을 설치하면서 당나라는 세력을 서쪽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현종(당)|당현종]] 시기에 드디어 [[751년]] 당과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 간의 세기의 매치 [[탈라스 전투]]가 이루어졌다. 비록 당나라의 패배로 끝났으나, 이 과정에서 전해진 종이 제작 기술은 아바스 왕조가 지혜의 집을 짓는 등 학문적인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했다. 그것이 이어지고 이어지며 유럽의 [[르네상스]]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류:수당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