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垂拱}}} [목차] == 개요 == ||<-5><#a48252> '''[[당나라|{{{#fff 당나라}}}]]{{{#fff 의}}} [[연호|{{{#fff 연호}}}]]''' ||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예종(당)|예종]][br][[광택(연호)|광택]](光宅)[br]{{{-2 ([[684년]])}}}}}} || {{{+1 →}}}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예종(당)|{{{#fff 예종}}}]][br]{{{#fff 수공(垂拱)[br]{{{-2 ([[685년|{{{#fff 685년}}}]] ~ [[688년|{{{#fff 688년}}}]])}}}}}}'''}}} || {{{+1 →}}} || {{{#!wiki style="letter-spacing: -.5px; margin: 0 -10px" [[예종(당)|예종]][br][[영창(연호)|영창]](永昌)[br]{{{-2 ([[689년]])}}}}}} || [[당나라]]의 제5대 황제 [[예종(당)|예종]] 이단이 썼던 세 번째 연호로 685년부터 688년까지 사용되었다. 다만 [[사성(연호)|사성]], [[문명(연호)|문명]], [[광택(연호)|광택]] 연호와 마찬가지로 [[측천무후]]가 이미 황태후의 신분으로 섭정하고 국정을 좌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측천무후의 연호였다. 수공(垂拱)이라는 말은 《[[상서]]》 무성편에서 유래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믿음을 도탑게 하고 의리를 밝히며, 덕을 숭상하고 공로에 보응하니, 옷소매를 드리우고 팔짱을 끼고 있어도 천하가 다스려졌다. >(惇信明義,崇德報功,垂拱而天下治) 684년 반란을 일으켰던 [[이경업]]이 토벌된 이후 측천무후는 《수공격(垂拱格)》이라는 율령을 반포했다. 한편 688년, 당나라의 황족이었던 이정과 이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다. 측천무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란에 연루된 이들을 처형했으며, 당나라의 황족들을 대부분 숙청했다. == 주요 사건 == * 수공 원년([[685년]]): 연호를 수공으로 개원함. * 수공 4년([[688년]]): 낭야왕(瑯邪王) 이충(李沖)과 월왕(越王) [[이정(월왕)|이정]]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분류:당나라의 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