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1112_1241_3610.png|width=100%]]}}} || || '''성명''' ||송순(宋純) || || '''자''' ||수초(守初, 遂初), 성지(誠之) || || '''호''' ||기촌(企村), 면앙정(俛仰亭), 졸재(拙齋) || || '''본관''' ||[[송(성씨)|신평 송씨]](新平 宋氏) || ||<|2> '''출생''' ||[[1493년]]([[성종(조선)|성종]] 24) [[11월 14일]] || ||[[전라남도|전라도]] [[담양군|담양도호부]] 기곡면 상덕리[br](현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담양)|봉산면]] 기곡리 상덕마을)[* [[http://www.d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07|#]]] || || '''사망''' ||[[1582년]]([[선조(조선)|선조]] 15) [[2월 2일]] (향년 88세) || || '''시호''' ||숙정(肅定)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면앙정가]]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 생애 == 1493년(성종 24) 11월 14일 전라도 담양도호부 기곡면 상덕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상덕마을)에서 아버지 송태(宋泰, 1475. 8 ~ 1523. 8)와 어머니 [[순창 조씨]](? ~ 1544. 12. 24)[* 조시옹(趙時雍)의 딸이다.]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1세 되던 1513년([[중종(조선)|중종]] 8) 식년 진사시에 3등 18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513_002295|입격하고]] 1519년(중종 14) 별시 문과에 을과 1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19_002601|급제하였다]]. 같은 해 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숙청당했는데, 대신들은 1519년 별시 문과가 조광조 일파에 의해 [[농단]]된 시험이라며 시험 자체를 취소할 것을 요청했었다. 그럼에도 송순의 답안지 만큼은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501010_001#footnote_1|주제와 내용이 맞았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받은 바 있다. 1527년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1533년 [[김안로]]가 권력을 독차지하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지었다. 이때 지은 시가 바로 [[면앙정가]]이다. 이후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자 다시 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 부응교,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우부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윤원형]], [[황헌]] 등에 의해 탄핵받아 다시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명종(조선)|명종]]이 즉위한 후 다시 경직으로 복귀하여 동지중추부사로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후 개성부유수, 대사헌, 이조참판을 지냈으나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해 모함 받아 서천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다음해에 사면되어 선산 도호부사를 지내고 면앙정을 증축했다. 이 면앙정은 [[기대승]], [[김인후]], [[임억령]], [[박순(1523)|박순]], [[이황]], [[윤두수]], [[고경명]] 등이 찾아 호남 제일의 가단으로 인정 받았다. 이후 송순은 전주부윤, 나주목사,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의정부 우참찬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582년(선조 15) 2월 2일 별세하였다. [[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담양군 출신 인물]][[분류:신평 송씨]][[분류:1493년 출생]][[분류:158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