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송병하}}}'''[br]'''宋炳河'''}}}}}}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송병하.jpg|width=100%]]}}} || ||<|2> '''출생''' ||[[1926년]] [[12월 12일]] || ||[[평안북도]] [[의주군]] || ||<|2> '''사망''' ||[[2010년]] [[8월 28일]] (향년 83세)||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부천)|소사동]] [[가톨릭대학교 부천성모병원]]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83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독립유공자 [[송병철(독립운동가)|송병철]]은 그의 형이다. == 생애 == 송병하는 1926년 12월 12일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독립유공자 [[송복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주군에서 모친, 형 [[송병철(독립운동가)|송병철]] 등과 함께 살던 그는, 모친이 별세하자 아버지의 부름으로 1935년 초 [[만주국]] [[열하성]] 임유현(臨楡縣) [[산해관]][* 현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산하이관구(山海關區).]으로 건너갔다. 그후 부친의 권유로 1944년 5월 형 송병철과 함께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는데, 입대 후 약 4개월 간의 훈련을 마치고 참위로 임관, 이어서 정위로 진급해 제3지대 제2소대장 겸 훈련교관에 임명되어 신입 대원 훈련을 담당했다. 또한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상대로 초모 및 선전 공작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제1구대 제2소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송병하는 광복군 훈련교본 편찬위원으로 일하면서 [[미국]]·중국·[[일본]]군의 교련 방식의 장점을 가미한 훈련 방식을 고안해 군사훈련의 내실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신변 보호 임무를 수행하는 등 국민을 보호하는 임시정부 일원으로서의 사명을 맡았고, 임무를 완수한 후 [[인천광역시|인천시]] [[월미도]]를 통하여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7년 경찰에 투신하였고, 1950년 [[6.25 전쟁]] 이후에는 지리산지구 경찰전투사령부 203부대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삼척경찰서 경비계와 경찰기동대 등 주로 경비 부서에서 활약하다 1956년에 퇴직했다.[[https://www.gov.kr/portal/ntnadmNews/2011727?pageIndex=2&hideurl=N|#]] 경찰 퇴직 후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에 살며 여생을 보내다가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수여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그리고 2010년 8월 28일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부천)|소사동]] [[가톨릭대학교 부천성모병원]]에서 [[숙환]]으로 [[https://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37259.html|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2010년 8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의주군 출신 인물]][[분류:1926년 출생]][[분류:2010년 사망]][[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독립유공자 후손]][[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여산 송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