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송병엽}}}'''[br]'''宋炳葉'''}}}}}} || || '''이명''' ||박창식(朴昌植) || || '''본관''' ||[[송(성씨)|신평 송씨]][* 참판공파 25세 병(炳) 항렬. 족보명은 송병엽(宋炳燁).] || ||<|2> '''출생''' ||[[1914년]] [[9월 3일]][* 신평송씨족보에는 1912년 7월 22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 인근의 발산리와 함께 [[송(성씨)|신평 송씨]] 집성촌이다.] || || '''사망''' ||[[1967년]] [[1월 22일]]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송병일(1914)|송병일]]은 그의 4촌 동생이다. == 생애 == 1914년 9월 3일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에서 아버지 송원식(宋瑗植, 1882. 1. 25 ~ 1939. 2. 13)과 어머니 [[최(성씨)|수원 최씨]](水原 崔氏, 1883. 6. 17 ~ 1931. 11. 17) 최봉휴(崔鳳休)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35년 10월 중순 4촌 동생 [[송병일(1914)|송병일]]이 자신의 주산리 자택에서 주산리에 이미 존재하는 농촌진흥회(農村振興會)를 이용해 겉으로는 '도박의 방지, 공동경작' 등 '생활개선'을 내걸고 실제로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활동할 것을 제안하자, 이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10월 17일 송병일의 자택에서 김영기(金永基) 등 십수 명과 다시 회합하여 '주산농촌진흥회'라는 결사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같은 해 11월 말까지 여러 차례 임원회를 개최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1936년 1월 말, 송병일을 비롯한 3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장성경찰서에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6월 3일에는 송병일, 이종태(李鍾泰) 등 3명의 동지와 함께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송병일과 함께 했던 활동은 인근 삼서면 남계리에서 1934년부터 동일한 성격으로 결성되어 활동한 노동회(勞動會)라는 비밀결사와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일제당국은 이 사건을 소위 '장성독서회(長城讀書會) 사건'으로 칭하였다. 이후 그는 구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1937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424&evntId=0034992206&evntdowngbn=Y&indpnId=0000023204&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같은 날 광주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67년 1월 22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송병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신평 송씨]][[분류:장성군 출신 인물]][[분류:1914년 출생]][[분류:196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