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fff 손병희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민족대표 33인)] ---- [include(틀:한국을 빛낸 100명의 인물들의 등장인물 및 단체)]}}}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손병희}}}[br]孫秉熙 | Son Byong-hi'''}}}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손병희.png|width=100%]]}}} |||| || '''초명''' ||손응구(孫應九)[* 자 또한 응구(應九)였다.] || || '''족보명''' ||손상현(孫祥鉉) || || '''이명''' ||손규동(孫奎東)·이상헌(李祥憲) || || '''호''' ||소소거사(笑笑居士) || || '''도호''' ||의암(義菴) || || '''본관''' ||[[밀양 손씨]][* 국자진사공파 역승공계 44세 병(秉) 항렬.] || ||<|2> '''출생''' ||[[1861년]] [[4월 8일]] || ||[[충청북도|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br]{{{-1 (現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청주)|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 385-2)[* 현재도 이 지번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58052&cid=46623&categoryId=46623|청주손병희생가]]가 남아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 ||<|2> '''사망''' ||[[1922년]] [[5월 19일]] (향년 61세) || ||[[경기도]] [[경성부]] [[숭인동(종로구)|숭인동]] 상춘원(常春園)[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종로구)|숭인동]]) || || '''직업''' ||[[독립운동가]] || || '''종교''' ||[[천도교]] || || '''가족''' ||아버지 손두흥(孫斗興), 어머니 [[경주 최씨]][* 최정성(崔正成)의 딸이다.][br]형 손병곤(孫秉坤), 첫째 남동생 손병흠(孫秉欽)[br]둘째 남동생 손병권(孫秉權)[* 큰아버지 손두성(孫斗星)에 입양되었다.], 여동생 손소사(孫召史)[* 이후 손시화(孫時嬅)로 개명했으며,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과 혼인하였다.][br]첫째 부인 [[현풍 곽씨]], 둘째 부인 홍응화[* [[남양 홍씨]]다.][br]셋째 부인 [[신안 주씨]][* 주병규(朱炳圭)의 딸이다. 명월관 기생이였으며 본명은 주옥경 (1894 ~ 1982) 이다. 1914년에 손병희와 혼인했다.][br]슬하 딸 5명[* 그 중 셋째 딸 손용화는 독립유공자 [[방정환]]과 혼인하였다.], 조카 손천민(孫天民)[* 형 손병곤의 장남이다. 손병희보다 연상이었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말기 [[동학]]과 [[천도교]]의 지도자,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1919년의 [[3.1운동]]의 주역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가장 인지도가 높은 인물 중 한명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의 장인이기도 하다. == 생애 == 1861년 4월 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이면 대주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금암리 대주마을)에서 청주목 아전인 아버지 손두흥(孫斗興)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둘째 부인인 [[경주 최씨]] 최정성(崔正成)의 딸 소생이었으므로 [[서자]]였다. 가난과 주위의 냉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면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다. 1877년[* 천도교 측에서 1877년이라고 주장하지만 [[수신사]] 파견 연도를 보면 1876년이 맞는 듯.] [[괴산군]]에서는 배짱 좋게 수신사를 때렸는데 이유는 수신사가 하인을 학대한다는 것이었다.[* <계몽사 [[위인전]]>에는 수신사가 하인의 머리를 말총에 묶어 끌고 다니다 이를 목격한 손병희에게 맞았다고 한다.] 1882년 동학에 입도한 후 양아치 짓은 그만두고 [[신발]]을 만들어 팔면서 성실하게 수도하다가 이윽고 [[충주시|충주]]를 근거지로 한 충의포 도소의 대접주에까지 올라간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제2차 봉기에 [[북접]]의 총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이 시기 북접의 성향은 남접과 판이했다. 초기 북접과 남접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북접의 거병 이유를 남접군을 때려잡기 위해서였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실제로 동학농민운동 초기의 활약은 남접에서 다 했으며 북접과 같이 활동한 시기는 오히려 쇠퇴기이다. 자세한 것은 [[동학 농민 혁명]] 항목 참조.] [[남접]]의 [[전봉준]]이 이끈 [[호남]] 창의군과 공동 작전을 벌여 관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동학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후 손병희는 [[최시형]] 등 살아남은 북접 간부들과 [[원산시|원산]]으로 피신해서 숨어지내는 신세가 된다. 1898년 2대 교주 [[최시형]]이 붙잡혀서 처형당한 후 동학 북접의 도통을 이어받았는데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1901년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 이 때 [[도쿄]]에서 당시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던 역관 [[오세창]]과 교류하면서 기존의 존왕양이 사상을 버리고 [[개화]]론자로 전향한다. 본래는 [[청나라]]로 [[망명]]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일본에 재정착한 후 [[유학생]]을 유치하고자 조선과 일본을 왔다갔다 했는데 이 때 사용하던 [[가명]]이 이상헌(李祥憲)이다. 망명 시절 신분을 숨기고 충주 출신의 조선인 부호로 행세하던 손병희는 [[정치]] 활동에도 적극으로 나서서 이 시기에 일본에 망명 중이던 구 개화파 인사들과 두루 안면을 익혔다. 이 때 [[이용구]]는 손병희의 명령으로 국내에 돌아와 1904년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단발령]] 등 급진 개화 운동을 일으키는 한편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돕는 등 손병희의 충실한 수족 역할을 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진보회가 동학이었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져 정부에게 탄압당할 위기에 처한 때 이용구에게 친일파였던 [[송병준]]이 접근하여 자신들의 어용 조직인 [[일진회]]와 진보회를 합치면 [[일본 제국|일제]]의 힘으로 탄압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유령]] 조직이나 다름없던 초기 일진회에 진보회가 합쳐지면서 회장 자리를 얻은 이용구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불과했던 <한일합방론>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합방주의자로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손병희는 이용구의 변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일진회가 [[을사조약]]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이용구와 갈등을 빚게 되고 정교 분리를 내세워 동학에서 일진회 세력을 모조리 처내고 조직을 분리한다. 이후 출교당한 친일성향의 일진회는 이용구를 교주로 하는 [[시천교]]를 세우게 되고 손병희가 이끌고 있는 원조 동학은 1906년 손병희를 교주로 하는 천도교로 개칭한다. 1908년 손병희는 천도교 교주를 [[박인호(독립운동가)|박인호]]에게 넘기고 [[민족주의]] 운동에 본격 투신한다. 손병희는 [[교육]]이 독립하는 열쇠라고 판단해 1910년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1911년 [[동덕여자대학교|동덕여자의숙]] 등 본격적으로 애국지사를 양성할 수 있는 사립 [[학교]]들을 인수해 교육 사업에 나선다. 이후 천도교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 회의에 참석해 1919년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구속 기소되어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후 병보석으로 [[석방]]되고서 [[가족]]이 보는 앞에서 임종한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손병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 기타 == * 3.1 운동 때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탑골공원]](옛 이름은 파고다 공원)에 손병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3.1 운동에서 그의 주도적 비중을 반영한 모습. * 손병희는 조선 민간인으로서 최초로 본인 소유의 [[자동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 애마가 심지어 [[캐딜락]]이었다. 참고로 이 캐딜락에 대한 일화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자신의 차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캐딜락보다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임금의 자동차보다 좋은 것을 탈 수는 없다'''면서 고종의 캐딜락과 서로 바꾸어 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어차([[등록문화재]] 제319호)가 원래는 손병희의 차였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후술할 소문에 비추어볼 때, 천도교 자금으로 꽤나 호화롭게 생활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캐딜락에 관한 일화가 또 있는데, 운전석하고 유리벽으로 분리가 되어있는 [[리무진]] 버전[* 21세기 현재에도 최고급 리무진은 운전석과 유리벽으로 분리되어 있다.]이어서 [[수행기사]]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한 별도의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 손병희의 일화 운운 나온 것은 일제 당국에서 퍼뜨린 소문이 꽤 많다. 계간 '역사비평'에서 3.1 운동 당시 일제 당국의 발표나 분석을 따로 연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조선총독부]] 공식 발표나 기관지에서 자주 다루었던 기사가 요승 손병희의 엽색 행각이나 손병희와 기독교 [[선교사]]들 간의 밀착류였다. 전자야 당연히 [[흑색선전]] 목적이 짙었고 후자는 3.1 운동의 배후 세력을 기독교계 반일 인사들로 초기에는 봤다는 이야기인데 당대 현장 증인인 [[윤치호]]가 3.1 운동에 쓴 일기에 "사이비 교주 손병희가 순진한 사람들 재산 털어먹으려고 독립운동한다고 나서는구나!"라고 쓴 걸 보면 일제가 퍼트린 흑색선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당시에는 [[유인석]] [[안중근]]의 경우처럼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동학을 토비나 화적떼처럼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 신복룡 교수가 일제의 이런 자료를 분석하고 여러 후일담을 넣어서 어느 신문에서 "[[3.1 운동]]은 기생집에서?"라는 기사를 올렸다. 주제는 민족 대표 33인은 진정한 민족 대표가 아니라는 이야기와 이런 손병희의 행각과 민족 대표의 전원 변절을 들어 비판한다는 점. 문제는 그 신문에서 삽화를 기생이 민족 대표에게 서빙하는 장면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당연히 천도교 쪽과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이 반박해서 사과하기는 했으나 단행본에서는 사과하지 않고 있다. * 한때 방송에서 민족 대표 33인을 희화화한 인터넷 강사 [[설민석]]과 유족회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설민석은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를 하였으나, 유족회는 설민석의 방송 출연 중단을 요구했다. 이후 벌어진 재판에서 재판부는 "새롭게 건설한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까지 추서 또는 수여받은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심히 모욕적인 언사이지 필요 이상으로 경멸, 비하 내지 조롱하는 것으로서 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평의 범위를 일탈해 그 후손들이 선조에게 품고 있는 합당한 경외와 추모의 감정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설 강사에게 손씨 아들에게는 200만 원, 손자에게 150만 원, 증손자에게 100만 원, 현손자에게 50만 원, 그 밖의 민족대표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1인당 25~100만 원으로 해서 총 1,4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1114_0000473591&cID=10201&pID=10200|출처 링크]] 자세한 내용은 [[설민석/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조.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서관 앞에는 고려대학교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민족교육의 내실을 기르게 해 준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흉상이 놓여 있다.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0350|<‘보성에서 고려까지’ 114년 역사의 초석을 다지다 > (고대신문 2019.05.08.)]] || [[파일:손병희 선생 흉상.jpg|width=100%]] || == 대중매체에서 == ||
[[파일:제1공화국 손병희.png|width=100%]] || * 1981년 [[MBC]] 드라마 〈[[제1공화국(드라마)|제1공화국]]〉에서는 배우 김호영이 연기했다. '33회 - 이기붕과 자유당' 편에서 [[보성중학교(서울)|보성중학교]] 교주 시절 모습으로 잠깐 등장했다. 소년 [[이기붕]](김진만 분)이 보성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경주시|경주]]로 [[수학여행]]을 갈 때 키가 작다고 제외당했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대구광역시|대구]]까지만 [[기차]]를 탔고 대구에서 경주까지는 걸어가야 했다. 두 도시의 거리는 200리, 현재 단위로 무려 80km 가까이 되는 먼 거리이다.] 이에 이기붕이 교무실로 찾아가서 "작은 고추가 더 맵다"며 참석 의지를 드러내자 "그래, 사람은 항상 자신을 갖고 살아야지"라며 허락한다. * 1991년 영화 《[[개벽(영화)|개벽]]》에서는 배우 [[한영수(배우)|한영수]]가 연기했다. * 2019년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김중희]]가 연기했다. 또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조정석]]이 연기한 백이강은 손병희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 관련 문서 == * [[천도교]]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보성전문학교]] * [[고려대학교]]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동학·천도교 교주)] [include(틀:역대 고려대학교 이사장)]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학·천도교 교주]][[분류:청원구 출신 인물]][[분류:밀양 손씨]][[분류:급진개화파]][[분류:1861년 출생]][[분류:192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분류:고려대학교]][[분류:독립협회]][[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종교인]]